순정아,
왜 나는 재력이 엄청난 사람이 아닌 걸까? 돈이 정말 엄청나게 많이 있다면 나는 참 할 일이 많았을 것 같아.
우선 여기 호주에 한국, 중국 등 아시안 노인들을 위한 요양원을 설립했을 것 같아. 돈이 아주 아주 많지는 않고 조금 있는 정도라면 대신 치매 카페를 차렸을 것 같아.
요양원은 아니지만 아침, 점심, 저녁 식사가 모두 해결되고 커뮤니티 서포트 3급 정도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이 서빙을 하는 그런 치매카페 말이야. 식사 메뉴도 노인들이 먹기 좋은 영양가 좋은 죽 종류로 차려놓고 식기류도 떨어져도 안 깨지는 소재로 쓰고 sip cup, nose cup 다 구비해 놓고 가구 모서리마다 충격 완충제를 붙이고 화장실은 휠체어 엑세스가 되고 슬링도 있고 호이스트까지 천정에 부착해 놓은 그런 화장실이 있어야겠지. 정원에는 텃밭이 있고 만지고 안아도 되는 강아지 고양이 그리고 바라만 봐도 좋은 새와 물고기까지 있는 그런 카페 말이야. SNS로도 자랑할 만한 카페로 만들어서 젊은이들도 오는 그런 카페. 노인들의 가족들 중에도 분명 젊은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이 자신들의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오고 싶은 그런 카페가 있으면 참 좋지 않겠니.
그런데 순정아, 실은 나도 왜 주님이 내게 큰 재물을 주시지 않았는지 알아. 내가 그걸 귀하게 잘 쓰지 못하리란 걸 잘 아시는 거지.
십여 년 전에 엄마에게 내게 단 한 개 있던 명품 가방을 드렸었어, 가방끈이 비록 낡기는 했어도 명품 수선소에 맡기면 깜쪽같이 수선해 주니까 나중에 한국 가면 수선도 해야지 싶었어.
그런데 이번에 가서 보니 오래전에 이미 엄마가 가방을 직접 수선을 하셨더라. 명품 가방에 스크래치만 나도 기겁을 하는 여자들도 많던데 엄마는 과감하게도 해진 부분 양쪽 가방끈을 싹둑 잘라서 서로 붙여서 삐뚤빼뚤 실로 꿰매놓으셨더라고. 그걸로도 부족했는지 꿰맨 부분은 밴드로 칭칭 감아놓고. 얼마나 오래전에 붙여 놓은 밴드인지 완전 가방끈에 달라붙어서 녹아있어서 떼기도 힘들었어. 나는 명품을 좋아하지도 않는데도 가방의 가치가 손상되었다고 생각하니 속이 상하더라고.
결국 이런 거 아니겠니. 사람들이 다들 좋은 거라고 말하는 것도 내가 좋은 줄 모르고 관리를 못하는데 주님이 주시는 귀한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보고 제대로 관리할 수 있겠니. 주님이 귀한 것을 주어도 내 판단과 이성과 지식이 옳은 줄 알고 그걸 마음대로 재단할 사람에게 귀한 것을 절대 맡기시지 않을 거야.
순정아,
요양원 실습을 했던 첫 주는 매일 울었었어. 그냥 운전하다가도 눈물이 나고 집에서 밥을 먹다가도 눈물이 났어.
새로 입소한 중국 할아버지 한 분은 볼 때마다 울고 계시더라. 호주 백인들이 많은 요양원이지만 가끔 중국계 노인들 몇 분이 있었거든.
이가 다 상해서 음식을 잘 못 씹는 중국 할머니가 한 분 있었는데 그분에게는 특별히 밥이 식사 메뉴로 나왔어. 그런데 그 쌀이 동남아에서 먹는 길쭉한 쌀이었어. 그것도 죽으로 만든 형태가 아니라 스팀으로 쪘는지 딱딱하더라고. 그 할머니는 그 밥을 한참 씹다가 그냥 물로 꿀꺽 삼키시더라. 그 할머니는 영어도 안되고 자신의 나라 말을 할 수 있는 직원도 없으니까 나만 보면 자신의 배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그 밥을 먹으면 배가 아프다고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시면서 바디랭귀지로 내게 하소연을 했어. 다른 요양사 앞에서는 억지로라도 물로 삼키면서 밥을 드셨는데 내 앞에서는 꼭 바디랭귀지를 하면서 하소연을 하셨어.
그래서 내가 실습 나온 학생이 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을 뛰어넘어서 결국 요양원 음식을 관장하는 제일 높은 사람을 만나서 건의를 했고(그 과정이 그렇게 참 오래 걸리고 힘들더라고!) 그 사람으로부터 그 쌀을 충분히 익혀서 그 할머니에게 제공하겠다는 대답을 들었어.
그런데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쌀의 상태는 똑같았어. 여전히 할머니는 밥을 먹으면 자신의 배가 아프다는 신호를 보냈고 결국 그 할머니의 식사 보조는 내 책임이 되었어. 할머니에게 밥을 떠먹여 드리는 역할이었는데 나는 포크로 할머니의 밥을 최대한 으깨서 먹여드렸어. 얼마나 세게 으깨야했는지 항상 포크가 기역자로 휘어 버렸지.
그 할머니에게 필요한 음식은 한국인이 먹는 쌀을 불려서 온갖 야채와 고기를 잘게 다져서 끓이는 한국식 죽이었는데 내가 함부로 죽을 만들어서 가져다줄 수도 없는 일이고… 규칙에 위배되고 보호자도 아니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었어. 나는 3주간의 실습생일 뿐이잖아. 3주 후에는 그 할머니는 다시 으깨지지 않은 딱딱한 밥을 물에 삼켜서 드셔야 하는 거잖아.
나는 속으로 몹시 안달이 났는데 다행히 실습이 끝나기 전에 그 할머니의 딸이 방문했어. 나는 그 딸에게 할머니가 드시는 쌀이 딱딱한 종류의 쌀이니 쌀 종류를 바꿔 달라고 요양원에 요청해야 한다고 말했어. 그 딸은 의아한 얼굴로 내게 물었어.
“왜 당신이 직접 요양원에 요청하지 않죠?”
순간 당황했지만 나는 설명을 했어.
“말했는데요, 바뀌는 거 같지가 않아서요. 보호자가 직접 요청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저 실습생일 뿐이니까요.”
그 딸이 어깨를 으쓱했어. 나는 다시 말했어.
“쌀을 못 씹고 삼키세요. 손으로 가리키면서 배가 아프다고 시늉을 하시고요.”
“아, 원래 턱이 아파서 음식을 씹지 못해요.”
그렇게 말하고 그 딸은 나를 쳐다봤는데 그녀도 나도 서로를 그렇게 바라본 채로 몇 초의 시간이 흘렀어. 그녀가 이제 우리의 대화는 끝났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았어. 나는 그래도 당신 어머님이 요양원에서 잘 지내신다는 둥의 말을 얼버무리며 방을 나왔어.
내가 이런 이야기와 몇 가지 다른 에피소드를 요양원에서 일하고 있는 지인에게 털어놓았을 때 지인은 이렇게 말했어.
“요양원은 병원과 달라요. 병원은 치료를 잘 받아서 집으로 돌려보내는 목적을 둔 곳이지만 요양원은 죽으러 가는 곳이에요. 나는 지금까지 일하면서 요양원에서 나와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노인을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어요. 그곳은 죽어야 나올 수 있는 곳이에요.”
죽어야 나올 수 있는 곳. 그 말이 주는 충격이 가시고 나서 나는 그녀에게 물었어.
“내가 그분들 가족들 사정을 다 알 수는 없어도요, 가끔 가족들의 태도가 좀 차갑게 느껴질 때가 있거든요. 가까이 살면서 자주 방문하지 않고. 한 번은 어떤 할머니 신발이 없어서 가족에게 연락했는데 일주일이 지나도록 새 신발을 안 가지고 오는 거예요. 그 할머니는 매일 자기 혼자 맨발이라고 저에게 하소연하시는데.”
“가족들도 지친 거 아닐까요? 그런 노인분들 자식들도 이미 머리가 하얀 노인들이에요. 요양원에 들어갈 때 집 다 팔고 그걸 요양원에 보증금으로 넣고 가구며 짐 다 정리하고 여행 가방 두 개 들고 들어간 거잖아요. 노인네 돌아가시면 그 보증금 기다리는 자식들도 있어요.”
순정아, 요양원에 있는 노인들 가족들이 나는 기본적으로 참 좋은 사람들이라고 믿어. 그러니까 그런 시설 좋은 요양원에 부모님들을 모셨겠지. 그런데 가끔 너무 지쳐버린 가족들, 본인들 살기에도 너무나 힘든 그런 사람들도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 같아.
요양원에서 너는 노인분들 마지막 가는 길에 복음을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게 너의 커다란 보람이라고 말했었지. 나도 그 비슷한 것을 느꼈었어.
아직도 내 마음속에 계신 요양원에서 만난 할아버지가 한 분 있어.
호주 할아버지이신데 젊을 적 사진을 보니까 정말 영화배우처럼 생기셨었더라. 그 할아버지와는 하나님 얘기를 나누며 가까워졌어. 그분의 모습을 보고 본받고 싶은 점이 너무 많았어. 대부분 요양사가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노인들에게 친절했지만 그래도 그중에 한 명쯤은 거친 사람이 있기 마련이잖니? 그 할아버지는 그 거친 요양사가 자신을 담당하는 날이 돼서 자신의 몸을 거칠게 다루게 되는 그 순간이 오면 눈을 질끈 감으셨어. ‘참자, 결국 이 순간은 지나간다’ 마치 그런 표정 같았어. 내가 그 할아버지를 담당할 때는 볼 수 없는 표정이었어. 그분은 내가 만난 사람 중 처음으로 내 명찰을 보고 정확하게 내 한국 이름을 발음하신 분이야. 그리고 우리가 주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후 내게 사랑한다고도 하셨지. 그건 세상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어. 주님의 이름 아래에서 말하는 사랑이었지.
그걸 모르는 동료 요양보호사는 깔깔거리며 놀렸지.
“너를 사랑한대! 그 나이 돼도 남자는 남자다.”
삶의 마지막 과정 중이셔서 몸에 욕창도 있으시고 밥을 삼키는 것조차 힘들어하셨는데… 그 할아버지와 나눈 대화는 네게 다 말하지 못하겠어.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될지 자신이 없어. 내가 실습을 마치면서 할아버지 보러 꼭 다시 올 거라고 말하니까 미소를 지으시면서 ‘그때쯤 나는 이미 여기 없어’라고 하시더라.
순정아,
네가 그런 일을 하고 있었던 거였더라. 나처럼 요양사는 아니었고 너는 사회복지사로 일했지만 말이야. 나는 이제야 네게 그 일을 하면서 왜 노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게 된 거야.
나는 교회를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아무리 건물이 훌륭한 교회를 가도 항상 건축헌금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교회에서 요양원 건축 헌금을 받는 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죽어서 천국 갈 거니까 이 땅에서는 어떻게 죽던지 상관없는 거 그런 건 아니잖아.
사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기에 죽음 직전에 가는 곳에 대해서도 알려고 하지 않는 거잖아. 죽음이 바이러스처럼 묻을까 봐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신앙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 육체의 죽음 후에 또 다른 생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니까. 그런 신앙인들이 평화롭고 기쁘게 육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곳을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어.
순정아,
이제 그곳에서 너는 여자, 엄마, 아내, 딸로서의 그 모든 역할들을 벗어버리고 진정한 자유를 얻었지?
그렇게 이 땅을 떠나기 힘들어했는데 막상 가보니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평화와 영광이 가득한 곳이지?
누가 그러더라.
‘하나님이 진짜로 존재한다면 왜 아프리카 아이들이 굶어 죽는 걸 보고만 있습니까?’
그 질문에 누군가 답을 했어.
‘이 세상은 하나님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와 싸우는지 잊지 마세요. 이 세상은 전쟁터이고 하나님에게는 더 많은 아군이 필요합니다.’
또 다른 답변은 이렇게 우리에게 반문하더라.
‘우리가 인간이라면 우리는 왜 아프리카 아이들이 굶어 죽는 걸 보고만 있습니까?’
순정아,
이제 진짜로 안녕. 네가 암 투병을 하면서 그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그렇게나 살고 싶어 했던 날들을 나는 살고 있는데 더 충분히 더 행복하게 더 기쁘게 살지 못해서 미안해. 아직도 내 인생에 대해 불평이 많은 나지만 그래도 최대한 감사하면서 살아볼게. 주님이 주신 날들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몰라도 때로는 게으르게 때로는 부지런히 그렇게 나답게 살게.
미안해. 좀 더 일찍 너가 만난 주님을 함께 경험해 주지 못해서.
고마워.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나를 만나주고 내게 하나님 전해줘서.
네가 있는 그곳에서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서로를 알아보지 못해도 좋아. 악이 사라진, 완전하고 충만한 평화와 기쁨이 우리에게 있을 테니까.
사랑해, 순정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