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 내곡리 산골 마을에서 태여나 국내에서도 멀리 한번 구경 다녀본적이 없는 준영이 엄마는 중국 이라는 남의 나라 땅에 가볼수 있다고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뛰였지만 선뜻 나서기가 그래서 일단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사나이는 기회는 자주 오는게 아니라며 준영이 엄마가 혼자서 애들을 키우는게 안쓰러워서 도와 주려고 그러는건데 싫다면 다른 사람을 알아봐야 하니 잘 생각해 보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날 저녁, 준영이 엄마는 우리 집에 왔다.
역시 같은 보천군 내곡리 태생인 우리 어머니를 그는 이모라고 부르며 따랐다.
두 사람 모두 혜산시에서는 서로의 남편들 외에는 친척이 없어 기쁠때나 슬플때나 의지하며 살았다.
우리 아버지가 도 인민위원회 꽤 높은 간부직에 있다가 모함에 걸려 제지공장 노동자로 쫓겨 내려와 심리적 스트레스를 견뎌내지 못하고 쓰러지셨을 때에도 준영이 엄마는 우리 어머니와 함께 며칠밤을 지새며 아버지의 병상을 지켰고 반대로 준영이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셨을 때는 우리 어머니도 준영이 엄마를 붙잡고 같이 오열을 터뜨리며 슬퍼 하시기도 했다.
나이로 보면 우리 어머니가 십년도 넘게 이상벌이여서 준영이 엄마는 늘 애로가 있거나 모를게 있으면 우리 어머니를 찾아와 속상한 얘기도 하고 또 물어도 보군 하였다.
그날도 우리 집에 온 준영이 엄마는 장마당에서 철송 무역회사 지도원을 만났던 일과 그 사람을 따라서 애들을 몇달 친정에 맡겨놓고 중국에 있다는 무역회사 식당에서 돈을 좀 벌어오면 어떨가 하는 당신의 생각을 우리 어머니에게 털어놨다.
자종치종을 다 듣고난 우리 어머니는 무조건 반대 입장 이셨다.
국가 기관이나 조직의 추천에 의한것도 아니고 가다오다 만난 사람의 말을 어떻게 믿을수 있으며 방학도 아닌데 이제 막 소학교에 입학한 준영이를 잡아떼면 어쩔거냐고 하셨다.
더우기 기아의 보이지 않는 무서운 바람을 타고 곳곳에 사기꾼들이 역세해 배고픔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불쌍한 심리를 이용하여 인신매매를 대낮에도 내놓고 하는 판국에 조심해야 된다고 우리 어머니는 거듭 당부하셨다.
하지만 머리를 숙이고 심중한듯 했으나 준영이 엄마의 마음은 벌써 그때 압록강을 넘고 있었다.
그날 준영이 엄마가 우리 어머니에게 이야기 하던중 한가지 사실만은 숨기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 남자가 준영이네 집까지 드나들었다는 것이며 때로는 밤늦게 왔다가 새벽에 사라지군 했다는 것이다...
예전 같으면 적어도 한달에 한 두번은 울 집 문턱을 넘던 준영이 엄마가 두달이 되도록 전혀 나타나지 않자 어머니는 나보고 어느날 학교에서 오던길에 그 집에 들려서 오라고 하셨다.
수업을 마치고 준영이네 집에 가보니 문은 자물쇠가 잠겨있었고 깨여진 창 유리 틈으로 발돋움 하여 들여다 보니 집을 비운지 오래 된듯 사이문도 꼭 닫겨 있었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말씀 드리니 어머니는 한숨을 쉬시며 분명 속히워 간것 같은데 어데 가서 무슨 고생을 하려고 떠났는지 모르겠다며 엄청 속상해 하셨다.
우리 어머니의 근심은 괜한것이 아니였다.
몇달이 지나면 돈 벌어 온다던 준영이 엄마는 6개월이 지나고 일년이 넘어 해가 바뀌였는데도 돌아 오지 않았고 준영이 외할머니와 청진에 나가서 살림을 하는 외삼촌도 우리집에 와서 사연을 물어보고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 쉬며 안타까워 했었다.
그렇게 한해가 지나고 다음해 여름,
준영이 엄마가 집을 떠난지 꼭 14개월째 되던 어느날,
준영이 외할머니가 준영이를 데리고 또다시 우리집에 오셨다.
출입문 밖 저쯤서부터 허둥대며 오시는 모습이 여간 놀란 기색이 아니였는데 아니나 다를가 우리 어머니를 보시자 마자 하시는 말씀이 준영이 엄마가 왔다는 것이다.
깜짝 놀란 우리 어머니가 지금 어데 있느냐고, 언제 왔냐고 다급히 묻자 준영이 할머니는 어제 리 담당 보안원이 찾아와 중국 공안에 잡혀 세관으로 넘어온 준영이 엄마가 지금 도 집결소에 있으니 면회 가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기가 막혀 한동안 넋나간 사람처럼 한동안 말없이 서계시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시고 잠시 생각에 잠기시더니 일단은 그 안에서 고생하고 있을 준영이 엄마가 걱정 되시여 만나야 겠다고 하시며 음식이랑 면회품을 대충 준비해 가지고 준영이 외할머니를 따라 강구동에 있는 도 집결소로 갔다.
북한에는 각 도 마다 집결소가 있다.여기에는 불법 도강자,부랑자( 일명 꽃제비 ), 공민증(시민증) 이나 증명서 없이 자기 구역을 이탈한자,비 사회주의 적인 행동을 했거나 근거가 있어 보이는 자 등, 보통 최 하층 서민들을 상대로 죄가 있거나 있어보이는 사람들을 기본 사법기관의 조사전에 강제로 잡아두고 일반인들이 할수없는 험한 노동을 시켜 일시적으로 착취하는 국가 기관이였다.
가기에 앞서 어머니는 중고옷 장사를 하는 옆집 성민이네 집에 가시여 전화로 도 안전국에 있는 아버지의 친구분에게 집결소에 이야기를 해 달라고 부탁 하시였다. 당시에는 높은 간부집이나 돈 많은 장사꾼들 집에는 유선전화가 있었던것이다.
집결소에 도착하여 정문에서 보초병에게 이야기 하니 전화로 안쪽에 대고 문의를 하고는 어머니에게 거수경례 까지 하면서 들어가라고 하는 것이였다.
사실 가족 외에는 면회가 어려웠지만 아마 도 보안국 에서 벌써 전화가 왔었나부다 하고 생각하시며 어머니는 준영이 그리고 준영이 외할머니를 앞세우고 들어가 면회실에서 기다렸다.
조금후에 마중켠 칸 저쯤서부터 여름내 가뭄에 탄 벼이삭 같이 상접한 몰골에 누런 죄수복을 논 밭의 허수아비 처럼 펄럭여 뛰쳐 나오는 준영이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온 그는 세 사람을 일별 하고는 머리를 들지도 못하고 고개를 뒤로 젗히고 흐느끼더니 이내 무릎을 끓고 준영이를 부둥켜 안고 엉~~엉 울었다.
판결이 나기 전이라 근접 면회가 안되는 상황이였지만 보안국의 꽤 높은 급에 계시던 아버지의 친구분의 전화가 효력이 있어 준영이 엄마는 손에 수갑 마저도 풀고 면회에 나왔던 것이다.
한참을 그러던 준영이 엄마는 할머니와 우리 어머니 앞에 엎드려 자기가 죽일 년이라며 가슴을 쥐여 뜯으며 곡을 했다.
사실 우리 어머니는 욕도 하고 싶으셨지만 그래도 살아서 돌아 왔으니 다행이라며 그를 달랬고 준영이 외할머니는 새끼들 다 버리고 돈 벌려 간다더니 감방에 같혀 이게 무슨 꼴이냐며 헝클어진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목놓아 우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