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아무리 깊은 산속이라도 반드시 사람의 흔적이 있다.
고난의 행군이라 일컷던 그 시절, 상위 몇프로의 극소수를 제외한 2천여만의 온 나라 민생이 먹을게 없어 온갖 약초와 산나물과 열매를 찾아 마을과 가까운 산을 이잡듯 헤집고 다니며 이미 다 캐고 없어 산이란 산은 다 찾아다녔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긴 지금 중국이다.
그것도 어느쪽이 사람사는곳인지 조차 모르는 광활한 백두원시림이다.
한겨울의 이 넓은 백두산 수림속에서 사람의 흔적을 찾아다닌다는게 사실상 망망대해에 표류하는 작은 난파선의 운명과 다를게 없다.
오늘은 준영이를 잃었지만 내일은? 또 모레는?...
내가 먼저일지 아님 일행중 다른 누가 먼저일지 우리는 지금 죽음의 언덕으로 스스로 걸어 가고있는것이다.
준영이의 죽음이 우리가 앞으로 처할 현실이고 운명이 아니라고 부정할수 없다.
거기에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이틀을 꼬박 눈길을 헤치며 뛰고 걸었다.
이젠 걸을 기운도 없다.
더우기 불쌍한 어린 준영이를 잃었다는 슬픔에...차디찬 눈속에 그를 묻고 가는 걸음이 마치 발목에 무거운 추를 달아맨듯 옮겨지지를 않는다.
점점히 흩날리는 눈발에 눈물을 머금고 하늘을 쳐다보니 온통 시커먼게 당장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기세다.
이제 눈이 내리면 준영이를 묻은 흰눈의 봉분은 더 두터워 지리라.
근처 사람사는곳은 못 찾아도 어디 자동차길이라도 있으면 그걸 기준삼아 준영이를 묻은곳을 짐작하고 봄날 눈이 녹으면 다시와서 땅속에 온전히 묻어주련만...
이제 겨우 동지달을 넘겼는데 5월초에야 눈이 녹기시작하는 백두산의 기나긴 겨울을 혼자서 눈속에서 얼마나 춥고 외로우랴...
나는 아까전까지도 내 앞에서 짧은 다리로 푹~푹 빠지는 눈속에 박힌 다리를 가재걸음으로 옮겨 디디며 용케도 그 멀고 험한길을 투정 한마디없이 걷던 그가 죽었다는게 믿기지를 않고 지금도 내앞에서 작은 가슴으로 쌕~쌕 거리며 내뿜는 숨이 입김으로 흩날려 내 얼굴에 닿이는것만 같았다.
그런 그가 없다는게..헐벗고 굶주리던 그시절에도 그나이때 사춘기 애들이 그러하듯 항상 밝고 명랑하던 준영이가 죽었다는 사실이 칼로 난도질 당한듯 가슴은 너무나 아프고 쓰라린 슬픔에 흐르는 눈물은 방울져 턱에 맺혔다가 그대로 고드름이 되어 매달린다.
아빠를 일찍 여위고 엄마마저 중국에 팔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와 앓아눕고 그 어린 나이에 동생마저 돌보며 철도 들기전에 세식구의 생계를 짊어지고 짧은 삶 자체를 하루,하루 전쟁을 치르며 살아온 불쌍한 준영이...
돈이 없어 졸업하고도 새 옷 한벌 못사입고 우리 어머니가 내가 입던 옷을 줄여준 낡은 옷을 입고도 행복한 얼굴로 좋아라 웃던 그를 내가 이 사지판에 데려다 죽인것같은 죄책감을 평생 어떻게 감내해야 한단 말인가...
멍에만 없다뿐이지 자기 키보다 더 큰 소달구지만한 구루마를 끌고 철길주변 화차 방통에서 떨어진 석탄을 주어다가 팔아서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가던 까무잡잡한 얼굴의 준영이 얼굴을 떠올리니 더욱더 가슴이 미여진다.
어슬녘, 시장 밖에서 싣고 온 석탄을 다 팔고 그 돈으로 말린 국수 한,두 사리를 사서 품에안고 새까만 얼굴에 흰 이를 드러내고 기쁨의 미소를 짓던 그 어리고 불쌍한 준영이가 피를 토하고 쓰러져 지금 저 눈속에 파뭍혀 영,영 일어날수 없다는 사실이 옮겨딛는 걸음,걸음 쏟아지는 눈물을 멈출수 없게한다.
앞서 걷는 금혁이아빠도, 어께를 들썩거리며 아직도 흑~흑 흐느끼는 은심이 은별이도 너무나 큰 슬픔과 충격에 말 한디없이 서쪽하늘 끝에 걸린 희미한 빛을 밀어내고 일행을 쫓아오는 어둠을 등지고 힘없이 한걸음,한걸음 옮겨딛고 있었다.
밤 자고 일어나면 역전 대합실 안팎에 굶어죽고 병들어 죽은 주인도 없는 시체들이 아무렇게나 나 딩굴고 저녁이면 낡고 썩은 동기와장이 바람에 날려갈가봐 무거운 돌멩이를 여기저기 얹고 옹기종기 들어앉은 집들의 등잔불 아래 아낙네들이 모여앉아 수~쉬 하며 어디서 누가 굶주리다 못해 인육을 먹었다는 소리가 매일같이 들리던 그 시절,
나와 준영이는 새벽 5시면 구루마를 끌고 눈이오나 비가오나 석탄 주우려 매일 혜산역으로 갔었다.
오토바이 바퀴처럼 베어링 축이 달린 고무타이어를 끼우고 싸이즈가 지금의 경운기 적재함만큼이나 큰 구루마 한대에 그때 돈으로 오천원정도 했었다.
백미 1킬로에 백원이였으니 5천원이면 꽤 큰돈인셈이다.
그렇게 비싼 구루마를 장만할수 없었던 준영이는 나랑 같이 우리집 구루마 한대를 가지고 혜산역으로 가서 마대자루에 새벽부터 오후 2 시 ~ 3시 까지 석탄을 줍고 20여리 길을 싣고와서는 시장 문밖에서 저녁을 짓기위해 땔감 사려나온 사람들한테 팔고는 했었다.
덕천탄광을 비롯한 평안도쪽에서 실려들어오는 무연탄은 화력이 쎄서 비싸게 팔렸지만 매일 실어오는게 아니였고 들어와도 실어나르는 화차방통들도 대다수 온전해서 흘리는게 많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무연탄이 들어오는날은 석탄도 정부소유라 한국에서 새벽시장 경매하듯 몰래 시장가보다 조금 싼 가격에 불티나게 팔렸고 혜산탄광을 비롯한 고산지대 탄광에서 나는 화력이 약한 갈탄은 화차방통도 낡아서 철길에 흘린게 많았고 값도 쌌다.
아마 그때 양철로 만든 바게쓰 한 바게쓰에 7~8원 정도 했었던것같다.
고등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7살에 가장의 무게를 짊어지고 생활고를 이어갈수밖에 없었던 준영이...
중국으로 오기전 얼마전까지도 속에 학생때 입었던 때 찌든 교복을 그대로 입고 꿰진 양말에 신발도 앞코가 닳아서 새끼발가락이 빼꼼히 내미는 낡은 겨울 동화를 신고 하루종일 먼지와 석탄가루를 뒤집어 쓴채 새까만 얼굴로 마대자루를 질~질 끌고 철길로반위를 넘나들며 석탄을 주어담던 가엾은 준영이 모습이 눈에삼삼 어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