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만요! 제발, 너무 급해서요.”
마감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았을 무렵,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제치고 한 남자가 다영 앞에 뛰어들었다. ‘줄 안 서요?!’라는 사람들의 날카로운 외침에도 의례적인 ‘죄송합니다.’란 말로 대응할 뿐, 새치기를 철회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에게선 술 냄새가 확 풍겼다. 붉게 상기된 얼굴, 하얀 와이셔츠에 체크무늬 넥타이, 뜬금없는 갈매기 무늬 반바지…….
느낌이 왔다.
“오늘은 여기서 마감하겠습니다.”
다영은 큰 소리로 외쳤다.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뭐야…’하고 투덜대며 뿔뿔이 흩어졌다. 모두가 수선스럽게 오고 가는 인파 속으로 사라진 뒤, 다영은 남자의 귀에 속삭였다.
“역시 그 문제겠죠?”
남자는 당장에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말문을 열었다.
“…제 인생은 이제…망했어요.”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와중에도 한 손은 아랫배를 움켜쥐고 있었다.
끄응, 하는 신음과 함께 남자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투로 다영에게 물었다.
“화, 화장실이 어딘가요?”
“아, 화장실은 저기 매점 쪽인데요.”
사색이 된 그의 얼굴을 보며 다영은 후다닥 왼쪽에 자리한 매점을 가리켰다. 그러나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쪽은… 막혔어요…….”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남자의 얼굴을 보며 다영은 매점 건물 화장실에서 무슨 일이 나도 단단히 났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대체 30분 전, 그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다영의 마음속에서 ‘화장실이라면 너무 원초적인 문제인데 괜찮겠어?’라는 I-에인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구나 그는 이성인데 끼어들어도 되는 걸까, 하는 우려와 함께. 한편, 그 옆에서 ‘네가 정녕 똥 때문에 인생 종 칠 뻔한 적이 없단 말이야?’라고 외치는 YOU-에인젤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다영은 혼란스러웠다.
결국 길을 일러주신 자는 신이었다. 다영이 5월 현장체험학습 인솔 때— 도시락으로 나왔던 초밥을 먹고 탈이 나, 버스에서 하마터면 쌀 뻔했던 위기가 있었다. 가뜩이나 학교에서 위엄이라고는 없는 교사인데 똥싸개로 낙인까지 찍힐 뻔했던 다영을 살려주셨던 버스 기사님이시여! 그분께서 센스 있게 잠깐 쉬어가자고 졸음 쉼터에서 차를 세우시지 않았더라면 다영의 의원면직은 더욱 빨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때 다영은 이 세상에 살아있는 하느님이 계신다면 바로 저 버스 기사님이라고 생각했다.
‘휘잇!’
다영은 신께서 걸어오신 길을 자신도 따라 걷기로 하였다. 휘파람을 불자 시간은 순식간에 30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눈앞에서 똥독이 올라 죽어가던 그 남자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일몰 직전의 태양 빛이 기다란 그림자를 만드는 시간— 멈춰 선 모두의 표정은 찰나의 감정을 제각각 사진처럼 담고 있었다. 웃는 자, 우는 자, 기뻐하는 자, 소리치는 자, 찡그리는 자, 시큰둥한 자, 몰두하는 자……. 그 속에서 다영은 남자를 찾아내어 인생이 망해가는 이유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다영은 달렸다, 화장실로! 휘날리는 머리카락 사이에 엉겨 붙은 땀방울을 쓱 닦으며 남성 칸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선 다영은 일단 멈추었다. 혹시라도 봐서는 안 될 장면을 보게 될까 염려스러워서였다. 하지만 이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아까 그 남자의 괴로움은 해결할 수 없을 터, 배변으로 하나 되는 인류애가 지금은 우선이 아닐까나! 똥쟁이를 수호하는 비밀 결사대에 빙의한 다영은 꿀꺽, 침을 한번 삼키고 닫힌 문을 열었다.
상황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역시 똥, 똥에서 비롯된 문제였다.
화장실은 두 칸이었다. 그중 하나는 선명한 빨간 글씨로 <고장>이라고 쓰인 종이 쪼가리가 붙어있었다. 그리고 반대편의 문은 열려있었지만… 다영은 굳이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귓가에 조금 전 남자가 소리쳤던 말이 생생하게 맴돌고 있었으니까.
“그쪽은… 막혔어요…….”
세면대 앞, 비좁은 공간에는 두 명의 남자가 마주 보고 있었다. 한 명은 다영을 찾아온 남자였다. 남자는 다영과 만났을 때와는 달리 위아래 모두 단정한 정장 차림이었다. 다만 푹 숙인 고개를 보아하니 앞에 있는 누군가가 굉장히 불편한 듯했다. 셔츠 앞주머니에는 아까 미처 발견하지 못한 회사 배지가 달려 있었다.
그런데 남자의 엉거주춤한 자세가 불길하여 다영은 슬쩍 그의 뒤태를 살폈다. 오, 마이 갓! 그의 엉덩이에는 조금 전까지 화장실에서 생화학 테러를 한 흔적이 뚜렷했다. 끔찍한 일이었다. 비로소 그의 난해했던 패션이 이해되었다. 바닥에 달라붙을 것만 같은 그의 고개도.
그다음은 남자 앞의 누군가를 알아볼 차례였다. 극 F인 다영이기에 남자를 위해서라도 부디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길 기도했다. 다영이 제일 먼저 살핀 것은 그 누군가가 상의에 회사 배지를 착용하고 있느냐였다. 하지만… 안타까운 일이었다. 다영이 누군가의 앞섬 호주머니 쪽에서 남자와 똑같은 배지를 찾아내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그가 인생이 망했다고 말한 이유가 이거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