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커먼 스토커 같은 녀석인 줄로만 알았건만 생각보다 유능한 녀석이었다, 운명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하품하며 거실로 나가자마자 아빠의 날벼락 같은 불호령이 다영에게 떨어졌다.
“선생 될 계집애가 이제야 일어났냐?”
“…뭔 소리야…?”
트로트 방송과 드라마 외에는 생전 보지도 않던 아빠가 바둑 대전을 고상하게 시청하면서 냉장고 앞에서 입 벌리며 기지개 켜는 다영이 한심하다는 듯 소리를 버럭 지른 것이다.
“내일모레가 개학이야. 너, 내가 박 교장이랑 최 교감에게 다 말해놨는데 출근 안 할 거야? 내일모레부터 출근할 거면 일찍 좀 일어나, 이 계집애야! 이러다 선생이 지각하겠어, 원.”
“박 교장이 누구야? 아빠가 무슨 박 교장을 알아?”
자고 일어나 어젯밤, 운명과의 조우 따윈 까맣게 잊고 있던 다영이었다.
— 선생, 개학, 출근, 박 교장, 최 교감. 아빠의 말에 다영은 얼굴에 찬물을 한 바가지 끼얹은 양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우리 아빠가 진짜 사학 재단 이사장이 되었구나. 약속은 지켰네. 그 시밤바 운명 숑키…….
“알지, 알지. 박 교장……. 하—”
“뭘 혼자서 그렇게 중얼대?!”
아빠는 영혼이 반쯤 가출한 다영의 꼴이 상당히 언짢은 듯 또다시 화를 벌컥 냈다.
“아냐, 아무것도 아냐. 아빠, 그런데 내가 출근할 학교가 어디더라?”
“이놈의 자식이 진짜 출근하기 싫어서 용을 쓰네! 주광고! 주광고! 주광고! 니 애비가 주광 학원 이사장이 된 지가 몇 년째인데 지금 그걸 몇 번째 물어보냐!”
급기야 스팀이 오를 대로 오른 아빠는 소파 위에 리모컨과 함께 가지런히 놓여 있던 효자손을 휘두르며 다영에게 달려들고 말았다. 다영은 등짝을 무려 세 대나 후드려 맞은 후에 간신히 방으로 피신했다.
“내일모레 주광고라, 마음의 준비가 아직 안 됐는데…….”
그러나 본디 출근에 마음의 준비 따위는 필요 없는 법이다. 당신, 내일 출근하기 싫습니까? 그렇다면 지극히 정상입니다. 혹시 지금 당장 퇴근하고 싶습니까? 네, 마찬가지로 정상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준비 따위는 하지 마시고 업무 준비나 하세욧!
그렇다면 다영은 급히 학교로 달려가 뒤늦은 업무 분장을 받는 게 보통의 개학 전 행보일 것이나— 지금 그녀의 위치가 어떠하던가?! 이사장의 따님 아니시던가, 껄껄껄. 덕분에 모든 일은 친절한 최 교감님의 안내 전화와 수업 준비 자료의 택배 수취로 해결되었다는 말씀.
‘캬, 이런 게 바로 특혜로구나. 그래. 바로 이거야!’
택배 상자에 들어있는 아주 빳빳한 교사용 새 국어 교과서를 펼쳐 보며 다영은 햇병아리 신규 교사여서 늘 쩌리였던 지난 학기를 떠올렸다. 저절로 눈가가 짭짤해지는 그 세월을 떠올리니 이 정도의 혜택쯤은 좀 누려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터—
“안 돼!!!!!”
다영은 갑자기 괴성을 질렀다. 아니, 지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의식의 흐름에 등장한 두 글자 때문이었다.
신. 규.
이 얼마나 한스럽고 모욕적인 말이던가.
다영은 자신이 신규 교사라는, 한 치의 도움도 안 될 정보를 새학기 첫 날부터 학생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온 학교에 공표했던 전임교 교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뒤로 아주 활짝 열린 헬게이트. 다영은 그대로 사춘기 남학생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다영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다시는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유순한 신규 교사로 또 한 번 사느니, 차라리 학교의 도라희가 되리라. 그래서 그 밑 작업을 위한 각종 업무 자료를 로켓 배송으로 급히 주문했다.
대망의 출근 전날, 다영은 밤늦도록 방의 불을 밝힌 채 전투 준비에 몰두했다.
다음날, 다영은 두 번의 지하철과 한 번의 마을버스를 타고 주광고에 도착했다. 중앙 현관을 유유히 통과하여 도도한 목소리로 ‘교무실이 어디죠?’를 물은 후 직감적으로 교무실 중앙에 자리한 교감 티쳐의 자리를 포착하여 그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출근하게 된 기간제 교사 주다영입니다.”
“아, 네. 주다영 선생…님…?!”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가 다영에게로 고개를 돌린 교감 티쳐는 순간 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영의 파격적 교사상에 충격을 받은 게 틀림없었다.
“네, 국어과 주다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