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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심한집사 Nov 03. 2024

한강에서 운명을 만나다

 서울의 밤하늘에도 별이 보이지 않는 건 아니다. 까만 바탕에 하얗게 반짝이는 빛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하는 시간— 바로 밤 8시. 다영의 퇴근 시간이었다. 1인 사업자가 되었지만, 인생의 워라밸을 위해서 근무 시간 엄수는 필수다. 나, 주다영은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하니까. 다영은 마지막 손님과의 상담을 칼같이 마무리하고 돗자리를 탈탈 턴 후 상담소를 정리했다. 오늘 하루도 돈 많이 번… 아니, 보람찬 하루였다.      


 그때, 웬 시커먼 남자 한 명이 불쑥 나타나더니 다영을 향해 다짜고짜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들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다영의 양 볼이 잘 익은 자두처럼 붉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허 참, 그거 그렇게 막 사용하시면 안 됩니다!”

 이게 웬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하긴, 이 공원에 정신 빠진 사람이 한둘인가. 어쩌면 노점에서 불법 영업 중이라고 누가 신고를 한 건지도 몰라서 다영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일단 빨리 튀고 보자는 동물적 감각이 뉴런을 타고 뇌를 짜릿하게 흥분시켰다.

 “네네, 죄송합니다아—”

 다영은 남자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는 홱 뒤를 돌았다. 그리고 출구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총총 걷기 시작했다.

 “거기 주다영 씨!”

 “아, 저요?”

 남자의 부름에 어쩔 수 없이 다영은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다고 했잖아, 이 숑키야— 라고 생각하면서. 아니, 그런데 저 숑키는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야? 진짜 구청 단속반이야, 뭐야.

 “아니, 그냥 가시면 어떻게 해요? 제대로 대답은 하고 가셔야죠!”

 “아… 저, 죄송하다고 사과드렸는데…….”

 “뭐가 죄송하다는 거예요?”

 “아니, 내일부터는 여기서 영업 안 하면 되지 않나…….”

 기세등등한 남자의 태도에 다영의 어깨는 절로 움츠러들었다. 그래서 개미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다영은 한창 잘나가는 <주다영 인생 상담소>의 빠른 철거를 약속하였다.     


 그런데—

 “내가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아니, 지금 그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그럼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건데요?”

 아까보다 더 펄펄 뛰는 남자의 태도에 의아해진 다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남자의 대답은 놀라웠다. 그는 다영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거 그,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 말이에요. 그거 그렇게 막 사용하시면 안 된다고요!”


  두둥!     


 이 남자는 뭔데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거지?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영의 몸에 난 솜털 하나까지 하늘을 향해 쭈뼛 섰다. 아무래도 이거이거 어마어마하게 위험한 놈이라는 빨간 신호가 무차별적으로 깜박이는데……. 이쯤이 퇴장할 시간인 듯하구나!     


 다영은 냅다 뛰기 시작했다.

 “야, 주다영! 거기 서!”

 “너라면 서겠냐?!”

 그렇게 달밤에 한강 변에서는 160cm의 여성과 185cm는 족히 넘을 듯한 남자와의 숨 막히는 추격전이 벌어졌다. 물론 다영이 잡히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둘은 일단 다리 길이부터 차이가 어마어마했으니까— (다영의 한 걸음은 남자의 한 걸음의 1/4 수준이었으니, 또르르…….)     


 “아니, 당신! 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왜 쫓아오는 거야?”

 결국 붙잡히고 만 다영이 씩씩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다영과 달리 흐트러짐 없는 호흡을 유지하며 조금 전의 그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말했잖아, 돈 좀 벌겠답시고 시간 함부로 되돌리지 말라고.”

 “아니— 근데 그걸 당신이 뭔데 상관하는 건데?!”

 “나?! 나는 운명이니까.”

 “뭐?! 이건 또 무슨 한여름에 롱패딩 껴입고 나와서 바다에 다이빙하는 소리야?!”

 “이 여자가 정말……. 운! 명! 나, 당신의 운명이라고.”

 다영은 기가 막혔다. 지난번 그 여자아이는 시계, 이번 남자는 운명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일들이란 말인가. 아무래도 내가 더위에 미친 게 분명한 것 같다.

 “미친 게 아니라고.”

 남자가 말했다. 그때 그 여자아이처럼 남자 역시 다영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다영은 덜컥 겁이 났다. 미친 게 아니라면 귀신에 홀린 건 아닐까, 처음부터 사람의 과거 따위를 본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였어— 나 아무래도 신병에 들렸나 봐.

 “하… 제발 진정 좀 해.”

 남자가 한 손을 자기 이마에 갖다 대며 골치가 아프다는 투로 말을 내뱉었다. 어이없다는 남자의 표정을 보니 다영도 자신이 신내림 받을 때는 아직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럼 대체 저 남자는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걸까? 야밤에 이렇게 스토커마냥 다영을 쫓아오면서 말이야.     


 그건 바로 운명, 자신에 관한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누구나 운명을 타고난다. 흔히 팔자, 신세, 복, 밥그릇 등으로도 부르는 운명. 태어나고 죽고, 그리고 살고. 일단 세상에 태어난 순간 사람들은 울고 웃으며 운명에 따라 살아가기 마련— 삶이 시작하는 바로 그때, 인간에게 저마다의 시계가 주어지는 것처럼 운명 역시 함께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운명이 다영에게 화를 내고 있다. 왜일까?     


 “시계가 느닷없이 네게 쥐여 준 그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가지고 너는 지금 네 운명뿐만 아니라 타인의 운명까지도 교란하고 있어. 그것도 고작 돈 때문에— 이건 우주의 섭리를 깨뜨리는 일인 거 몰라? 하여간 시계는 어린애 같아서, 원……. (참, 어린애 맞지) 제발 이제 그 장난질은 그만 멈추라고.”     

 운명은 단호한 목소리로 다영을 꾸짖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상담소 접으면 나는 이제 또 뭘 해 먹고 살아야 하나, 다영은 한숨만 나왔다.     


 “하… 그럼 난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어쩌긴, 운명대로 살아야지.”

 “내 운명이 대체 뭔데?”

 “몰라서 물어? 선생이잖아. 선! 생!”     


 자신의 운명에 대한 답을 듣자마자 다영은 머리가 띵해졌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학교에서 도망쳤는데 다시 돌아가란 말인가— 운명은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다. 다영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거… 운명은 개척하는 거라고들 하지 않나?!”

 다영은 일단 꿈틀, 해보았다.

 “강으로 모험을 떠날 순 있지만 강물의 흐름을 바꿀 순 없지.”

 그러나 운명은 지지 않았다. 다영의 패배였다.

 “또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진정 간절한 목소리로 다영이 물었다.

 “없어, 운명이 무슨 사지선다 시험인 줄 알아?! 이거 아니면 저걸로 찍게!”

 운명은 버럭 화를 냈다. 빠져나갈 구멍은 처음부터 없었다.      


 아니, 대단한 사명감을 가지고 사범대에 간 것도 아니고 우연히 원서 써서 붙은 국어교육과, 졸업하고 운 좋게 임용고사에 합격했을 뿐인데 왜 자꾸 다영에게 이런 시련이 찾아오는 것일까. 교실 안에는 망나니 중학생들, 교실 밖에는 서슬 퍼런 관리자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동료 교사들. 정말이지 다영에게 선생이란 직업은 맞지 않단 말이다! 눈가에 습습한 기운이 차오르는 것은 왠지 기분 탓이려니, 하기로 한 다영이었다.


 “그럼 조건이 있어.”

 마지막 끄나풀이라도 당겨 보려는 다영의 말에 운명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샐쭉하게 지어 보였다. 그러나 다영은 간절했다. 이판사판! 어떤 딜이라도 던져봐야 했다.

 “아니, 난 정당하게 부여받은 능력을 사용한 거잖아. 그리고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길을 찾은 것뿐이고. 그러니까 지금까지 사실상 내 잘못은 없었던 거잖아? 그걸 포기하고 다시 원상 복귀하는 셈이니, 이 조건은 들어줘야겠어

 “아— 알았어, 뭔데?”

 운명은 일단 들어나 보자는 표정이었다. 다영은 자신이 원하는 조건을 술술 불기 시작했다.


 “그… 이미 사직한 상태라 내가 당장 교사가 되려면 기간제 교사로 재취업을 해야 하거든. 기왕 재취업하는 내 운명을 사립 학교 이사장 딸로 덧칠 좀 해줘. 다시 말하자면 지금 우리 아빠가 그냥 구청 공무원이잖아. 그걸 이사장으로 바꾸고, 나는 그 딸로 해달라고. 아니, 내가 죽으려고 했던 거 너도 뻔히 알 텐데— 나도 살아야 할 거 아니야.”     

 다영의 콧구멍이 벌름거렸다. 말을 하느라 목이 메는 탓이었다. 치가 떨리는 그곳에 다시 돌아가야 한다니…….

 “그리고 나, 필요하면 이 능력 쓸 거야. 지금만큼 자주는 아니어도. 나 이거 분명히 쓰기로 하고 받은 거라고.”

 “아— 알았어, 알았어. 대신 지금처럼 돈을 좇아서 사용하는 건 사절이야. 그것만 아니면 나야 뭐 모로 가든 운명의 수레바퀴대로만 흘러가면 되니까. 그렇게 해.”


 둘은 그렇게 척— 악수했다. 다영과 운명의 협상이 타결되는 순간이었다.

 다영은 속으로 넘어오려는 말을 간신히 삼켰다.

 ‘하, 야 이 시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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