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 듣는 이를 가리키는 이인칭 대명사
정확히 39주 1일이 되던 날이었다. 내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만의 아기를 만났던 날은-
분명히 출산과 관련한 징후가 있어서 입원을 했음에도 좀처럼 진통은 올 기미가 없었고, 나는 꽤나 긴 기다림 끝에 유도분만을 위한 촉진제를 맞았다.
상황에 따라서 엄살을 부리는 연기를 하기도 하지만, 사실 나는 고통을 잘 참는 편이었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어릴 때부터는 주사 맞을 적에 우는 법이라곤 없었고, 엄마를 잃은 상실감도 결국 겉으로는 견뎌낸 척하는 데 성공했으며, 바로 전날의 내진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아 의사로부터 ‘역시 엄마들은 대단해.’라는 칭찬까지 들은 나였다.
그래서 무통 주사를 곁들인 진통도 견뎌낼 수 있을 거라 믿었건만, 오 마이 갓! 이건 무엇을 생각하든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온몸을 비틀며 울부짖는 산고 앞에서 머릿속에는 모성이고 나발이고 그 어떤 생각 따위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아무리 내 딴에 애를 써도 출산은 순조롭지 않았고, 결국 나는 자연분만에 실패했다. 그리고 제왕절개를 위해 수술실로 끌려들어 갔다.
나는 그날 수술 당시, 마취를 담당했던 전문의에게 묘한 양가감정이 아직도 남아있다.
생살을 찢고 몸속에서 태아를 끄집어낸다는 사실이 너무 두려워서 반드시 수면마취로 재워달라고 그리도 애원했건만... 알겠노라고- 곧 잠들 거라고 나를 달래던 그 마취과 의사가 나를 속이고 하반신 부분 마취만을 시행한 것이다.
덕분에 나는 통증은 없었으나 하복부를 절개하는 느낌, 무언가를 꺼내고 묶는 듯한 생경함, 그리고 ‘너무 아래야!’, ‘아, 이게 아닌데...‘ 등의 의사들의 불안한 대화들을 나는 스릴 넘치게 직관해야 했다. 이를 생각하면 아직도 그에게 원망만 가득하다.
그럼에도 갓 태어난, 그 작디작은 생명을 내게 가장 먼저 안겨줄 때의 그 감동- 세상의 공기를 처음 들이마시며 우는 그 울음에 “엄마가 미안해...”라고 말을 건네자 갑자기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조용해지던 교감의 신비란- 차마 그를 원망만 할 수 없게 했다.
그는 나를 보며 ‘그래도 아기는 엄마가 제일 먼저 봐야 해요.’라고 말했다. 그 말이 맞았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내게도 유전자에 아로새겨져 있던 동물적인 모성이 신생아와 눈을 맞추는 순간, 각성되었음을 알게 되었으니까-
내게는 비록 엄마가 없지만, 엄마가 될 수는 있었다. 나도 그녀처럼 자궁이 있는 여성이기에 모체로서 생명을 잉태할 수 있었거든. 그리하여 나는 아주 작고 여린 아기를 이 세상에 낳았다. 자랑스럽게도!
너무나 놀라운 건 내가 그 애를 보는 순간 지금까지의 모든 복잡한 감정은 사라지고, 맹목적인 사랑과 보호 본능에 빠져버렸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뭐라고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지극히 원초적인 감정이었다.
모성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정녕 이러하다면-
그럼에도 어린 나를 버리고 떠난 당신은 대체 어떤 엄마였던 걸까? 엄마가 된 지금, 나는 더욱 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