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 어떤 사실의 앞뒤, 또는 두 사실의 이치가 어긋나서 서로 맞지 않음을 이르는 말
사회의 순리에 따라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뒤따르는 과제는 바로 ‘출산’이었다. 서른이 넘어 결혼한 나, 거기에다 하필 우리 부부보다 시동생 부부가 먼저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은근한 심리적 압박이 차고 넘쳤다. 심지어 친족으로부터 이런 해괴한 말도 들었으니 말이다.
“결혼 전에 임신부터 하면 안 돼요?”
불행히도 나는 아직 그 무엇도 준비된 상태가 아니었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고 했던가-
아니면 내 직업적 특수성이 자녀에 대한 욕망을 자극했을까-
처음에는 오직 연애만 하자는 우리 부부의 만남은 어느새 결혼으로 이어졌고, 그렇다면 딩크로 살자는 굳은 다짐 역시 딱 한 명만 낳는 것으로 무장 해제되고 말았다.
하지만 결심을 했음에도 계속 따라다니는 불안이란-
내게는 바로 바람직한 어머니상이라는 역할 모델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바람직한 교사상, 바람직한 학생상, 바람직한 자녀상도 존재했지만... 오직 바람직한 어머니상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막연하게 아이를 낳는다면, 좋은 부모가 되어야겠다, 나처럼 애정에 대한 갈증에 시달리지 않는, 천진난만한 아이로 기르고 싶다는 소망만 존재할 뿐... 이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방법은 알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나를 버린 엄마를 알면서도, 나는 어리석게도 모성은 본능처럼 태아를 자궁에 품은 그 순간부터 발현되는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그 모성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는 만능열쇠일 것이라 여기고 말았다.
바로 그것이 고통의 시작이었다.
운 좋게 아이를 계획하고 임신은 순탄하게 되었지만- 이어지는 하혈로 인한 절박유산, 그리고 극심한 입덧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초기 유산의 위험으로 절대 안정해야 한다는 의사의 충고를 듣고 휴직원을 낸 후 침대에 누워 생활하기 시작했다. 엄마처럼 나 역시 아이를 보낼지도 모른다는 건 엄청난 두려움이었다.
입덧 역시 상상초월의 고통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냄새들이 나를 공격했다. 나는 며칠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로 변기를 부여잡고 위액도 아닌, 시커먼 액체까지 토해냈다. 이러다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고 싶다는 절망만이 가득했다.
심하게 토할 때면 또 하혈을 했다. 그러면 또 아이가 유산될 것 같아 두려웠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 엄마는 생물학적인 엄마가 아닌, 나만을 사랑해 주는 가상의 존재였다. 딸이 임신했다고 하면 달려와서 안아준다는 남들 같은 친정 엄마가 나에게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정말 간절히 바랐다.
때때로 내게 이런 괴로움을 주는 태아가 미웠다. 너는 엄마가 있지만, 나는 엄마가 없어. 나도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어. 나에겐 정녕 모성이란 게 없는 걸까?
아이를 지키고 싶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워하던- 그때의 모순된 감정은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내게 임신 기간은 정말 지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