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후반, 회사를 핑계로 2년간 자취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부모님과 한집 살이를 했다. 그 시간 동안 집밥만 먹어왔느냐 말하면 그건 아니다. 짱짱한 식욕을 자랑하며 짜고 자극적인 음식을 찾아다니기 바빴다. 특히 매운 음식이라면 사족을 못썼다. 오죽하면 매운 음식 먹을 때 가장 행복해 보인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나의 외식 메뉴의 선택 기준은 맵고 자극적일 것. 빨갛지 않은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나였다. 이런 내가 바뀌기 시작한 건 퇴사를 결심하면서부터다.
나에게, 그리고 가족들에 건강한 음식을 먹이고 싶은 마음에 장도 직접 본다. 원래 마트 탐방이 취미였는데, 요즘은 마트를 넘어 채소 가게며 시장이며 두루 돌아다닌다. 화장품 소비보다 식료품 지출이 배로 늘어났다. 이 가게 저 가게를 전전하며 채소 가격을 비교하는 모습에 엄마가 '우리 딸 살림꾼 다 됐네.' 하신다. 대형 마트를 돌며 세일하는 과자를 사 모으던 내가 채소를 고르고, 과일을 구매하는 모양새가 퍽 기특하신 모양이다. 초콜릿 대신 복숭아를 사고, 시리얼 대신 토마토를 구매하는 내가 낯설고도 기이하다.
우리 동네에는 일주일 두 번 열리는 작은 장터가 있다. 농협 건물 앞에서 임시로 열리는 좌판이다. 너덧 명의 농부들이 작물을 판매한다. 장터라고 부르기 어려운 쁘띠 사이즈지만 직접 키운 농산물을 파시기 때문에 늘 손님으로 북적인다.
광명시의 농부들이 직접 재배한 작물을 손수 파는 형태이기에 믿고 사 먹는 편이다. 텃밭에서 막 수확한 싱그러운 제철 채소는 제각기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다. 정형화되지 않은 못난이 채소들은 마트에 포장된 어여쁜 제품보다 맛이 좋다. 늦은 시간에 가면 이미 다 팔리고 없다는 게 유일한 단점이다. 특히 광명에서 나고 자란 찰토마토의 맛은 가히 환상적이다. 동네 장터에서 판매하는 토마토 맛을 뛰어넘는 녀석을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기에 동네 부심이 있을 정도다. 일주일에 단 두 번, 화요일과 금요일만 만날 수 있는 장터는 우리 동네 명물이라 하겠다.
집 근처에 채소 가게가 두 곳 있다. 채소만 파는 집은 아니고 제철 과일도 함께 판매한다. 두 곳 모두 집에서 도보 10분 내로 가까운 편인데, 그중 내가 애용하는 곳은 건널목을 두 번 건너야 하는 가성비 채소가게다. 이곳의 장점은 뭐든 양을 넉넉히 주신다는 점이다. 집 앞 5분 거리 채소가게의 오이가 7개에 이천 원이라면, 그곳에서는 8개에 이천 원에 구매 가능하다. 아파트 단지와 거리가 있다 보니 뭐든 저렴하게 판매한다. 다섯 시가 넘으면 눈치껏 오백 원씩 깎아주시기도 하는데,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가 득템 하기만 하면 된다.
얼마 전에도 커다랗고 실한 바나나를 단돈 이천오백 원에 업어오기도 했다. 오늘은 슬쩍 둘러만 봐야지 다짐해 놓고 매번 무너진다. 저렴한 데다 싱싱하기까지 한 채소를 보고 있노라면 사지 않을 수가 없는 거다. 그렇게 양손 무겁게 집에로 돌아온다. 이번주는 채소와 과일 쇼핑을 덜 하리라 다짐하면서.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는 여름부터는 맛있는 제철 과일이 쏟아져 나온다. 무더위에 지지 말라는 듯 입맛을 북돋아 줄 과일들로 풍년을 이룬다. 올해는 신비 복숭아와 토마토에 흠뻑 빠져지냈다. 신비복숭아는 6월 중순부터 약 2주간만 맛볼 수 있는 귀한 과일이다. 겉모습은 천도복숭아인데 속살은 백도복숭아처럼 하얗다. 달콤하고 신맛이 없어 입에 달고 살았다. 복숭아와 토마토, 그리고 약간의 단백질을 더하면 든든한 아침 식사로 그만이다.
신비복숭아 철이 지나니 초당옥수수가 왔다. 당도가 높아서 초당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더니 수분이 많고 달달하다. 아삭거리는 식감이 재미있어 하모니카 불 듯 손에 잡고 뜯어먹다 보면 금세 뚝딱이다. 이맘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제철 과일은 참외다. 찌는 듯한 더위가 찾아와 수박 노래를 부르기 전에 와구와구 먹어주어야 한다. 노란색이 선명하고 선이 짙은 녀석으로 고르면 된다. 다른 간식이 떠오르지 않는 시원한 단맛이다.
동네에 단골 채소 가게가 생기면서 제철 식재료와 급속도로 친해졌다. 9월의 제철 과일이 무엇인지 요즘의 제철 채소가 무엇인지 누군가 물으면 신나게 답을 줄 수 있을 정도다. 딸기가 들어가더니 자두가 나왔구나. 이제 감자가 나오는 철이 되었구나, 하는 식이다. '저렴하고 싱싱할 때 잔뜩 먹어두어야지'하고 제철 음식에 욕심부리는 낯선 나 자신과도 조금씩 가까워지는 중이다.
'오늘은 파프리카 가격이 좋으니까 사 가야겠다'라며 색이 선명한 파프리카를 고르는 일상. 매일 아침 오이를 챙겨 출근하시는 아빠를 떠올리며 장바구니에 오이도 잊지 않는다. 회사에서 출출할 때 꺼내 드신다는 우리 집 사랑둥이님의 원픽이니까. 채소 한가득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유난히 발걸음이 가볍다. 장보기는 건강한 제철 음식을 나에게, 그리고 나의 가족에 먹이는 일은 내 사랑의 표현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