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는 나의 기적입니다 33
아이의 화용능력은 말의 기술이 아니라,
‘내 마음을 아는 힘’에서 자라기 시작합니다.
준이의 검사지를 받아 들던 날
3월 초 준이의 올해 성격·심리 검사지를 받아 들던 순간, 마음 한쪽이 쿵 내려앉았다. 불안도와 회피 성향수치가 높았다. 종이에 놓인 숫자와 그래프는 단지 비교 자료일 뿐이라 여기며 엄마인 나는 그 사이에 숨어 있는 준이의 마음을 먼저 읽고 싶었다.
주의집중력이나 언어 처리 속도에서 또래보다 느린 부분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 1년간 준이를 지켜보며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준이는 느리지만, 꾸준히 자라고 있다는 것. 그래서 약물치료나 재검 여부를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지금 나에게 있어가장 중요한 질문은 단 하나였다.
“지금 준이에게 꼭 필요한 힘은 무엇일까?”
화용능력의 출발점은 단순한 언어 기술이 아니라 **‘내 마음을 정확히 아는 힘’**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준이는 아직 자기 마음을 명확히 알지 못한다. 싫어도 “괜찮아”라고 말하고, 속상해도 웃어넘기며,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늘 한 발 물러선다. 착해서인 것도 있지만 그보다 자기감정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요즘 상황에 맞는 말하기 이전에 내 감정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먼저 해왔다.
“준아, 지금 어떤 기분이야?”
처음엔 늘 “몰라”였지만, 나는 준이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설명하며 “엄마는 네가 (말을 하지 않아서) 조금 답답해 보였어”라고 대신 문장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면 준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마음을 비로소 받아들이곤 했다.
영국의 공인심리치료사로 유명한 안젤라 센의 **『나를 지키는 관계가 먼저입니다』**심리서에서는 관계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상대의 마음보다 내 마음을 먼저 아는 일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내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면 상대의 요구나 분위기에 쉽게 끌려다니며 결국 관계 속에서 나를 잃기 쉽다는 내용이다.
이 책에서는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I-메시지를 추천한다. 상대를 탓하지 않고 내 감정의 상태를 솔직하게 전달하는 표현이다.
“너 때문에 속상해”가 아니라 “나는 지금 조금 불편해. 그래서 잠깐 쉬고 싶어.”
이런 표현은 상대를 공격하지 않으면서도 내 감정을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작은 문장이
관계 안에서 나를 지키는 건강한 경계가 된다고 나와있다.
이 내용을 읽으며 나는 자연스레 준이가 떠올랐다. 늘 “괜찮아”라고 말하며 자신을 뒤로 미루던 준이가 사실 자기 마음을 잘 모르는 상태였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그래서 준이가 배워야 하는 것은 적절한 말하기 기술보다 먼저,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표현하는 힘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 준이와 가장 많이 연습하는 것이 바로 거절 문장이다. 거절은 상대를 밀어내는 행동이 아니라
내 마음을 지키는 가장 기본적인 경계이기 때문이다.
“이건 다음에 하자.”
“잠깐 쉬고 싶어요.”
“나는 이렇게 하고 싶어요.”
아직은 서툴고 어색한 표현들이지만 이 짧은 문장을 반복해 보는 경험이 준이에게는 ‘내 마음도 중요하다’는 감각을 키우는 첫걸음이 되고 있다.
화용능력은 나의 마음 → 상대의 마음 → 상황 판단 → 적절한 표현 이 흐름으로 자란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역할놀이를 한다.
친한 친구의 역할
마음 표현이 서툰 친구의 역할
늘 양보하던 준이가 아닌, 스스로 요구를 말하는 아이의 역할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등장인물의 역할
역할이 달라지면 준이는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내가 이 친구라면 뭐라고 말했을까?”
“이럴 땐 거절해도 되지 않을까?”
“내가 듣고 싶은 말은 뭘까?”
관점을 전환하는 경험을 통해 준이는 자기 마음과 타인의 마음을 동시에 읽는 힘을 키워가고 있다.
준이에게 일기 쓰기는 하루의 일과 중 하나를 골라 그 사건 속에서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정리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많은 일을 적지 않는다. 대신 하루 중 한 장면을 골라 그때 느낀 감정과 하고 싶었던 말을 차분히 적어본다.
예를 들면 이렇다.
“쉬는 시간에 친구가 내 지우개를 말도 없이 갑자기 가져갔다.
나는 웃었지만 사실은 조금 속상했다.
그때는 ‘괜찮아’라고 했지만 다음에는 ‘조금만 쓰고 돌려줘’라고 말해볼래.”
짧지만 이 기록 안에는 **사건 → 감정 → 나의 말**이 구조가 담겨 있고, 이는 화용능력의 핵심을 정교하게 다져준다.
준이는 6세부터 9세가 된 지금까지 꾸준히 놀이치료를 받고 있다. 6-7세 때 치료는 주로 **‘어떻게 놀 것인가’**를 알려주는 방식이었다. 놀이 경험이 부족한 유아기에는 무엇을 가지고 어떤 스토리를 만들지 구체적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등 2학년이 된 지금, 놀이치료의 초점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는 놀이의 기술보다 놀이를 하는 나의 마음부터 들여다보는 과정이 중심이 되었다.
“지금 어떤 마음이 들었니?”
“이 장면에서 너는 어떤 기분이었어?”
“상대는 어떻게 느꼈을까?”
놀이 상대와 함께 놀고, 협력하고, 다투고, 다시 화해하는 초등 저학년 시기에는 정서적 상호작용이 무엇보다 중요한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놀이치료 상담 시간은 아이뿐 아니라 엄마인 나 자신을 다시 들여다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아이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믿었지만 사실 어떤 순간에는 내 기준과 조급함 때문에 아이를 충분히 받아주지 못한 때도 있었다. ‘공부는 이 정도 해야 한다’는 나의 기준, 노력에 비해 초라한 결과가 나왔을 때의 속상함, 집중하지 못하고 숙제가 오래 걸릴 때의 조급함 등.. 그럴 때면 나는 준이를 닦달했고, 준이는 나를 두려워하며 움츠러들었다.
상담 선생님은 아이를 대하기 전에 먼저 엄마인 나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라고 조언해 주셨다. 엄마가 언제 아이를 대하기에 가장 불편한지 체크해 보고 아이를 대하기 전에 스스로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엄마의 정서가 안정될 때, 아이의 말문도 열립니다.”
그 말은 지금도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빛처럼 오래 남아 있다.
우리 집 책장에 오래 꽂혀 있던 코리 도어펠트의 그림책 **〈가만히 들어주었어〉**는 내가 놓치고 있던 중요한 지점을 다시 일깨워주었다. 주인공 테일러가 애써 만든 장난감 탑이 무너졌을 때 속상해할 때, 여러 동물 친구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위로하거나 조언을 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하려 애쓴다. 그러나 테일러는 그 모든 시도를 거부한다. 그 방식이 틀려서가 아니라, 마음이 준비되지 않은 순간에는 위로도 훈계도 모두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마지막에 한 마리 토끼가 조용히 다가온다. 토끼는 설명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테일러 옆에 조용히 앉아 **“가만히 들어주는 일”**만 한다. 그때 비로소 테일러는 마음의 문을 열고
스스로 감정을 꺼내 정리하기 시작한다. 회복은 바로 그 경청과 공감 속에서 시작된다.
이 장면을 보며 나는 준이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지난날 나는 아이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으로, 혹은 조급함과 불안 때문에 준이에게 설명하고 가르치고 조언하려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것이 테일러 주변의 동물 친구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요즘 나는 준이에게 토끼 같은 엄마가 되고자 다짐한다. 일단 들어주고, 감정의 파동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리고, 준이가 스스로 마음을 꺼내려고 할 때 조용히 곁을 지키는 엄마.
준이가 자기 마음을 알아차리고 표현해 나가는 과정에서 내 말보다 내 귀와 기다림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 그림책이 다시 깨닫게 해 주었다.
준이는 아직 느린 부분이 많고, 친구도 단짝 몇 명뿐이고, 성격도 조심스럽다. 하지만 예전 준이를 떠올리면
지금의 모습도 감사할 따름이다. 다행히 학교에서 부진하지 않고, 받아쓰기와 수학 단평도 꾸준히 80점 이상 나온다. 참으로 고맙고 기특하다.
비록 내년은 교과목이 확 늘어나는 초3이라서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앞으로도 준이와 나는 묵묵히, 열심히 노력해보려고 한다. 준이가 아직은 엄마의 손길을 많이 필요로 해서 나는 휴직을 연장하기로 했다. 경제적으로 조금 빠듯하더라도 준이 옆에서 한 번 더 지켜주고 싶어서다.
언어지연·소근육·시지각 지연 진단을 처음 받았던 날의 막막함을 기억한다. 그래서 지금 이 글을 통해 비슷한 길을 걷는 부모님들에게 나의 글이 조금이라도 위로와 희망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화용능력은 결국 언어적 기술 이전에 마음을 읽는 힘이다. 자기 마음과 타인의 마음, 두 마음 모두를 읽을 수 있어야 된다. 준이는 오늘도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의 마음과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연습을 열심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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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ela Sen, 『나를 지키는 관계가 먼저입니다, 쌤앤파커스, 2023.
Cori Doerrfeld, 『가만히 들어주었어』(The Rabbit Listened), 북뱅크,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