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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작업의 힘: 뒤죽박죽에서 ‘술술’로 바뀌는 순간

내 아이는 나의 기적입니다 34

by Rani Ko

1. 교과 성취는 밑작업에서 시작된다


교과성취를 위한 밑작업.


준이를 가르치면서 가장 처음 난관에 봉착한 것은 뭐든 저절로 되는 게 없다는 것이었다. 하나하나 밑작업이란 게 들어가야 진도를 나갈 수 있었다. 예컨대, 지금 2학년에서 배우고 있는 4. 시각과 시간의 단원 진도를 나가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연산 연습이 필요했다. 1분은 60초, 1시간은 60분, 1일은 24시간, 1주일은 7일, 1년은 12개월이라는 어른에게는 너무 익숙한 단위의 반복 연습. 이게 안 되면 4단원의 문제 풀이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가뜩이나 60진법도 10진법과 헷갈려 어려운데 거기에 24시간, 7일, 12개월까지 등장하니 준이의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다.


아닌 게 아니라 가르치는 나도 어렵다. 꼭 100점이 아니어도 학교 단원평가에서 목표 성취도는 이루어야 하는데 걱정이 앞선다. 그래도 매일매일 열심히 하는 준이다. 안 하려고 꾀부리거나 딴청 피우지는 않는다. 이런 태도만 해도 절반은 성공이다. 얼마나 대견한가. 이제 엄마가 방향만 맞게 제시해주면 된다. 그러면 어떻게 접근하면 되겠는가?

엄마한테 꾸지람을 들어도 매일 매일 열심히 하는 준이가 희망이다.



2. 뒤죽박죽을 견디게 하는 연습의 힘


연산 학습지로 개념을 설명하면서 계산이 익숙해질 때까지 여러 번 반복한다. 그 후 기본 개념 문제를 풀고 응용, 심화로 나가야 한다. 여기서 또 어려운 점이 있다. 시각과 시간은 문장제 글밥 자체가 수준이 어렵다. 특히 언어가 취약한 준이에게는 문제를 읽고 이해하는 것 자체가 도전이다. 그래서 엄마는 계속 옆에서 같이 문제를 읽고 의미를 생각해보고, 이야기 나누는 과정을 반복한다.

먼저 왼쪽과 오른쪽에 나와있는 사진처럼 연산 밑작업을 거친 후 가운데 문제풀이로 접근해야 아이의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시간 단원이 어려운 이유는 단순 계산의 문제가 아니라 ‘단위 변환–독해력–상황 이해’가 동시에 요구되는 복합 과제이기 때문이다. “몇 시에 출발해 몇 시에 도착했는가”, “전체 소요 시간은 얼마인가”와 같은 문항은 아이에게 문장을 읽고, 장면을 떠올리고, 필요한 정보를 골라내는 능력을 모두 요구한다. 언어 토대가 약한 준이에게는 하나의 문제를 풀기 위해 여러 인지 과제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셈이다. 그래서 지금 엄마가 하고 있는 일—문장을 함께 읽고, 의미를 나누고, ‘상황을 그려보는 힘’을 천천히 쌓아주는 과정—은 단순한 학습 보조가 아니라 시간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밑작업이다. 이 반복이 차곡차곡 쌓이면 어느 순간, 준이는 글 속 문제 상황을 스스로 구성해내고, 비로소 시간 단원의 구조가 눈앞에서 풀리기 시작한다. 이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고 나서야 준이는 조금씩 조금씩 문제를 술술 풀기 시작한다.




3. 이해의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


그때부터는 학습이 비로소 ‘진도’가 아니라 ‘이해’의 속도로 움직인다.
엄마가 계속 붙잡아 주어야만 풀던 문제들도, 이제는 스스로 읽고 스스로 손을 움직여 본다. 물론 완전히 혼자서 모든 문항을 해결하는 단계는 아니다. 그러나 한 문제를 풀기 위해 들여야 했던 시간이 조금씩 줄고, 같은 유형의 문제 앞에서 당황하지 않는 변화를 분명히 확인하게 된다. 아이의 속도는 늘 일정하지 않지만, 성장은 그 일정하지 않은 속도 사이를 관통하며 분명히 쌓인다.




4. 준이가 보여준 ‘첫 독립 문제 해결’


며칠 전, 준이에게 “몇 시에 시작해서 몇 시에 끝나면 총 몇 분일까?”라고 묻자 놀랍게도 곧장 종이를 가져와 숫자를 적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엄마, 이게 무슨 뜻이야?” 하며 질문부터 쏟아냈을 텐데, 이번에는 문제 문장을 스스로 천천히 읽고 중요한 단어를 동그라미까지 쳤다. 나는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뒤 준이는 손가락으로 60, 30, 15를 세어 보며 실수를 몇 번 고친 뒤 결국 정확한 답을 찾아냈다.
“됐다!” 하고 환하게 웃던 그 표정은, 그동안의 반복과 작은 성취가 얼마나 큰 자신감으로 이어지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5. 조용한 배움, 단단한 성장


배움은 원래 조용하게 자란다. 어느 날 갑자기 뛰는 것도 아니고, 누가 보게끔 화려하게 자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매일 조금씩, 어제보다 한 글자 더 읽고, 한 문장 더 이해하고, 한 번 더 손을 움직이는 과정 속에서 자란다. 그리고 부모는 그 흐름을 곁에서 지켜볼 뿐이다.

가끔은 멈춘 듯 보이고, 가끔은 돌아가는 듯 보이지만, 아이는 결국 자기만의 속도로 앞으로 전진한다. 준이의 학습도 그랬다. 60초와 60분, 24시간과 7일이 서로 뒤엉켜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 혼란의 시간을 통과하고 나면 어느 날 문장 속 시간의 흐름이 자연스러운 그림처럼 펼쳐진다. 아이가 혼자 문제를 읽고, 의미를 짚고, 답을 찾아가는 장면은 부모에게 더없는 선물 같다. 그 조용한 성장의 순간이, 결국 이 아이의 배움이 앞으로도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엄마는 비록 그 과정이 고단하고 힘들지라도 준이가 이해의 문을 조금 더 열 수 있도록 옆에서 계속 지켜봐주고 도와주겠다고 오늘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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