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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반도의 榮華와 이슬람의 유대인

2. 중세 이베리아반도의 유대인 생활상.

by 김병훈 Jan 22. 2025

2. 이베리아 반도의 영화와 이슬람의 유대인 


이베리아반도는 대략 500년 동안 전 세계 유대인 역사의 중심 장이 된 유대인 문화의 부흥기였습니다.

2000년 간의 유대인 방랑 역사를 돌이켜볼 때 유대인들은 800~1100년 사이 이베리아반도에서 누렸던 번영을 잊지 못합니다. 2000년에 걸친 기나긴 디아스포라 기간 중 가장 자유롭게 그들의 자질을 꽃피운 시기를 이베리아반도 시절로 꼽고 있습니다. 그다음이 현재의 미국이라 합니다.

당시 이베리아반도의 이슬람 문화 분야의 중추적 핵심 인재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한 이슬람 왕국은 유대 민족에게 관대했고, 오랜 세월 이슬람 세력과 유대 민족은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이슬람 왕국이 분열되고 이슬람 근본주의를 강조하는 알모하드 왕조가 등장하자 유대인은 또다시 박해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유대인은 스페인 카스티아 왕국으로 흘러 들어갔고, 훗날 스페인 왕국은 이슬람을 이베리아반도에서 몰아내고 지중해 패권을 차지하게 됩니다.


(1) 유대인과 그리스인의 이베리아반도 진출. 


기원전 15세기경에는 가나안의 페니키아인들에 의해 지중해와 북해를 오가는 해상교역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상교역이 활발해지자 중간에 거점항구가 필요했습니다. 서유럽 최초의 도시 카디스(스페인 남서부의 항구도시)가 탄생했습니다. 이베리아반도는 유럽의 끝, 지금의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위치한 지역으로 지중해를 끼고 아프리카와 마주 보고 있는 교통의 요지라 하겠습니다.

페니키아인들은 지중해 연안에 식민도시들을 연이어 건설하고, 개방적인 해상무역 민족답게 현지 원주민들과 많은 종류의 물건을 교역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교역로 인접 지역의 광산을 개발하고 전략적 요충지역인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반도 남부지역에 공장을 건설해 방대한 해상 교역망을 구축했습니다.

이런 영향으로 이베리아반도는 주변에 비해 일찍 문명이 발달했고, 이는 로마가 갈리아 지방보다 먼저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페니키아인의 뒤를 이어 이베리아반도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사람들이 유대인입니다. 기원전 10세기 솔로몬 왕 시대에 유대인들은 ‘다시스 상선대’를 운용해 이베리아반도와 대규모 교역을 시작했습니다. 다시스는 카디스 인근에 위치한 타르테소스로 추정됩니다. 이때부터 이베리아반도에 유대인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습니다.


(2) 로마제국의 이베리아반도 진출. 


로마제국은 지중해의 여왕이라 불렸던 카르타고를 멸망시킴으로써 이베리아반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은 이베리아반도에서 서유럽 팽창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습니다. 이베리아반도 총독 출신의 황제가 네 명이나 나왔습니다. 4세기 무렵부터 유럽 여러 나라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은 이베리아반도로 몰려들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쇠퇴기에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반달족서고트족이 이베리아반도에 쳐들어왔습니다. 서고트족이 이베리아반도에 서고트 왕국을 세웠고, 이후 711년 이슬람교도들의 침입으로 붕괴되었습니다.

 

(3) 이슬람 왕국의 영화를 도운 유대인. 


622년 이슬람 왕국을 건설한 이랍인들은 유대 민족에 대해 매우 관대했고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그들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 상당수가 로마의 폭정을 피해 당시 이집트의 수도였던 알렉산드리아로 옮겨가 살았고, 그중 많은 유대인이 점차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반도로 이주했습니다.

지중해 교역이 융성해지자, 상업이 발달하고 기후도 살기에 좋았기 때문입니다.

이슬람 시대 동부 지중해의 번성은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매년 많은 이슬람들이 동부 지중해 해로를 통해 메카 순례를 행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이집트에서 출발한 곡물이 이 길을 따라 이스탄불로 운반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슬람교도들이 이베리아반도로 들어오자, 이들을 가장 환영한 사람들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적인 측면에서 이슬람교도들은 유대인들을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하며 비교적 우호적으로 대했기 때문입니다. 이슬람교는 예수를 무함마드 이전의 선지자로 간주합니다. 때문에 예수를 죽였다고 유대인을 박해하는 기독교와는 달리 유대인에 대한 악감정이 없었습니다.

유목민족인 아랍인들은 예전부터 유대인들을 늘 ‘책 읽는 민족’으로 알았고 우수한 지식인으로 여겼습니다.

더구나 정복자로서 여러 생소한 지역의 행정을 맡다 보니 그 지역 유대인들의 해박한 지식과 더불어 외국어 구사 능력이나 외국 문물에 대한 이해력이 꼭 필요했을 것입니다.


(4) 중세 이베리아반도의 유대인 생활상. 


이베리아반도는 상업의 발달로 경제적 발전이 눈부셨는데, 이는 이슬람 사회가 처음부터 상업의 존재를 인정했고 상인에게 높은 도덕적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가 상인 출신인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고기가 물 만난 격으로 그들의 상업적 재능을 맘껏 펼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해상교역뿐 아니라 환전업, 대부업, 전당업 등 초기 형태의 금융 산업을 쥐고 있었습니다. 어음제도를 활용해 경제 번영을 이룬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 코르도바 등지에서 상업 외에도 유대 문화가 꽃피었습니다. 훗날 서구에서는 이탈리아 상인들이 14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어음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자의 복리 개념이 아직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을 때부터 유대인에게는 가문의 비밀로 전승되었다는 것입니다.아인슈타인은 ‘복리 계산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위대한 수학적 발견’이라고 극찬하면서 세계 여덟 번째 불가사의라고 경이로움을 표시했었습니다. 복리는 처음 몇 년 동안은 가치 증가 속도가 미미하지만, 장기로 갈수록 급격하게 늘어납니다. 유대인들은 ‘시간과 복리’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시간과 복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개념은 ‘돈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돈을 번다’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돈은 ‘버는’ 게 아니라 ‘불리는’ 것이라는 점을 먼저 배우게 됩니다. 이는 일견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큰 차이입니다. 


야만적인 베르베르족이 1013년에 코르도바를 점령해 유대인과 관계가 좋았던 우마야드 왕조를 붕괴시킴으로써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세상이 바뀌자, 유대인들이 거둔 사회적 신분 상승 및 문화적 우수성에 대한 질시는 이민족 간의 종교적 대립 양상으로 첨예화되었습니다. 1066년 유대인 민족 봉기는 그라나다 박해로 이어져 유대인 5,000명 대학살로 치달았습니다. 이로써 유대인들의 황금 시절도 종식되었고, 이슬람 지배자들은 유대인에게 이슬람 정통 신앙을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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