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기 전, 우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철저히 준비했다. 아이의 옷, 간식, 장난감까지 빠짐없이 챙기고, 꼭 필요한 서류들과 지갑, 휴대폰 충전기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챙겼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아이가 소리쳤다. "엄마, 내 토끼인형 어디 있어?"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아이의 애착인형 토끼인형을 두고 온 것이다. 처음에는 '뭐, 괜찮겠지. 곧 잊어버릴 거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녁이 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익숙지 않은 호텔방, 낯선 냄새, 그리고 곁에 없는 토끼인형. 아이는 토끼가 없다는 사실에 불안해하며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밤새 아이를 달래느라 나도 남편도 잠 한숨 못 잤다.
그때 문득 생각이 들었다. ‘재난 상황에서의 임시대피소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익숙했던 모든 것들을 두고 갑자기 낯선 곳에 머물러야 하는 상황.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준비해야 할까?
재난가방을 준비할 때, 누구나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건 물, 음식, 의약품이다.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들 말이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심리적 안정’ 역시 중요하다. 특히, 아이에게 있어 애착인형 같은 물건은 생존만큼이나 중요한 요소일 수 있다.
만약 그날, 우리 아이의 토끼인형을 챙겼더라면 아이는 좀 더 안정적으로 밤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대피소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에게는 꼭 필요한 약, 어떤 이에게는 사진 한 장, 어떤 이에게는 작은 책 한 권이 그들을 심리적으로 지탱해주는 중요한 요소일 수 있다.
재난가방은 한 사람의 생존과 안전을 위해 필수적이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각자의 '마음의 안식처'이기도 해야 한다. 각자에게 필요한 물건은 다르기 때문에, 모두의 재난가방은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다.
여행에서의 작은 실수로 인해, 나는 비로소 재난가방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 토끼인형 하나가 주는 안정감처럼, 각자의 삶에서 중요한 물건들은 재난 상황에서도 꼭 챙겨야 할 ‘마음의 생존 도구’가 될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미리 알고 준비하는 것이다. 그것이 물일 수도, 음식일 수도, 또는 아이의 애착인형일 수도 있다. 재난가방은 사람마다 달라야 하고, 그렇게 준비된 가방은 비상 상황에서 진정한 안식을 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