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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감시.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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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성준 Sep 22. 2024

5장: 추방자.

타인들로부터 따돌림 혹은 버림을 받은 사람.

배선과 전자 장비로 가득한 실내에선 백색소음만이 들려온다.

'PsID:AB:73.174 time=1.456 밀리초.'

진공포장된 커피 한 잔은 고무 튜브를 통해 정확히 포장된 120 밀리리터의 양을 전달한다.

'PsID:AB:73.174 time=0.789 밀리초.'

연락은 두절되었고, 이 하얀 성채에 갇힌 이들에게 더 이상 남은 것은 없었다. 그들은 고향을 보지 못한다.

'PsID:AB:73.174 time=0.000 밀리초. 경고.'

개척자들이 추방자가 되어, 이 하얀색 연옥 위에 섰다. 크리스티나 대장의 목소리는 긴장으로 떨렸고, 그녀는 대원들에게 재촉했다. "구조 요청을 보내. 당장. 위치는?" 한 대원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현재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지구와의 모든 교신이 끊긴 것 같습니다." 폴은 그 광경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옆에 있던 동료 제이크에게 물었다. "제이크, 크리스티나가 저렇게 흥분한 걸 본 적 있니?" 제이크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가, 폴? 우린 완전히 좆 됐다고. 근데... 너 뭐 읽는 거야?" 폴은 제이크에게 웃으며 손에 든 책을 내보였다. "책." 폴은 웃음을 띠며 책을 흔들었다. "제목은 <감시>야. 대충 어떤 미친놈의 삶을 담은 내용이지. 글은 기괴하고... 뭐랄까, 진지한 척하는 개똥철학 같은 거 있잖아? 있어 보이려고 애쓴 책 말이야. 딱 그런 거야." 제이크는 어이없다는 듯 폴을 쳐다보며 말했다. "폴... 너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거 같은데. 우린 완전히 고립됐어. 넌 하나도 안 무섭냐?" 폴은 여유롭게 책장을 넘기며 대답했다. "이봐, 친구. 난 이미 오래전에 다 포기했어." 그의 시선은 책에 고정된 채로, 여전히 흘러가는 문장을 따라가고 있었다. "뭔 내용인데?" 제이크가 물었다. 책 표지에는 마른나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식물 키우는 방법 같은 거야?" 폴은 비웃듯 웃으며 답했다. "하하, 아니, 뭔 미친놈 얘기더라고. 그 왜... 조울증 걸린 미친 새끼? 또라이? 스토커? 크크, 뭐 그런 내용이지." 제이크가 히죽거리며 맞받아쳤다. "그거 완전 너잖아, 이 친구야." 그러던 중 크리스티나가 두 사람을 향해 외쳤다. "지금 노닥거릴 시간 없어! 움직여!" "예, 대장님." 폴과 제이크는 동시에 대답했다. "폴, 현재 연료가 얼마... 이봐!" 제이크가 다급하게 폴을 불렀지만, 폴은 대답 대신 침대로 몸을 던졌다. 그는 자신의 책을 펼치며 무심하게 누워버렸다. "폴, 너 뭐 하는 거야? 이러다 우리 다 죽는다고!" 제이크는 이제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폴은 태연했다. 그는 한 장 넘긴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너도 앉아서 쉬어. 친구, 체스는 좀 해봤나?" 제이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폴을 쳐다보았다. "겁쟁이 새끼. 완전히 포기했군." 그 말에 폴은 미동도 없었다. 제이크는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달려갔다. 폴은 자신의 책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이 책을 쓴 놈은 글을 쓸 줄 모르나? 존댓말을 썼다가, 반말을 썼다가, 개소리를 했다가… 그냥 등신인가?" 그의 의문 섞인 혼잣말은, 외부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와는 다르게 고요하고 고립된 울림으로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는 피로에 지친 몸을 벽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잠이 들었을 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 눈을 떴을 땐 실내가 어둠에 잠식되어 있었다. 한 조명도 켜지지 않은 암흑 속에서, 폴은 책 표지를 다시 바라보았다. "마른나무의 책 표지라… 이 표지는 다분히 모욕적인데." 창밖을 바라보자 우주의 모습이 무지개처럼 형형색색의 빛깔로 변해갔다. 신비로운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자, 폴은 기쁨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와우! 이건 정말 환상적이군!" 폴은 창밖을 바라보다가, 저 멀리, 털보 선장의 해적선이 우주를 떠돌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 순간, 폴은 자신을 집어삼키는 듯한 절망에 사로잡혔다. 그의 마음속에서 끔찍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 "난 병신이야... 이대로 죽고 말겠지... 끔찍해…!!! 살려줘... 제발...!!! 내 두 눈을 누군가 파내줘...!!" 그의 목소리는 점점 절박해졌고, 숨이 가빠졌다. "난 이런 환각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아... 내 공기를 없애서... 질식시켜 줘... 죽음이라는 안식을 줘…!" 빗물이 우주선의 창문을 때리며, 비현실적인 풍경 속에서 노란 택시들이 우주를 떠다녔다. 폴은 그 혼환상적인 파티 속에서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좋아요, 이제야 흥미가 생기는데요?" 폴은 크리스티나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우주비행사용 실내복을 입고 있었고, 그 모습은 그에게 한 폭의 그림처럼 완벽하게 보였다. 금발의 머리카락은 부드러운 빛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반짝였고, 그녀의 푸른 눈은 그를 바다처럼 깊이 빨아들이는 듯했다. 크리스티나의 새하얀 피부는 마치 처녀의 순수함을 지닌 듯 보였고, 폴은 잠시 동안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헤맸다. 크리스티나는 마치 오래된 의식을 치르듯, 느릿한 동작으로 기계 장치들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 속에서 폴은 홀리듯이 그녀를 불렀다. "로즈, 이걸 봐요. 저 택시들! 참 아름답지 않나요?" 폴은 크리스티나에게 말했다. 크리스티나는 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오, 신사분. 만나서 반가워요." 그들은 조종실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마치 그 순간, 그들이 우주에 고립된 상황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구조 요청 따위는 그저 하나의 핑계에 불과했고, 택시는 우주를 배회하는 장식일 뿐이었다. "오, 로즈. 나의 하나뿐인 친우 제이크는 어디에 있나요~~?" 폴이 비꼬듯 물었다. 물론, 제이크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제이크는 그곳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우주선 어디에도 제이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사실은 폴도 알고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질문이 제멋대로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음... 죄송합니다. 그... 로지가, 로제가... 로즈가, 아니지." 폴은 중얼거리며 스스로 혼란스러워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흐릿해졌고, 마침내 그 어색한 침묵 속에서 말을 이어갔다. 크리스티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신사분, 저희 집에는 창고가 없어요.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거죠?" 폴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크리스티나의 말이 자신에게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해보려 했다. 하지만 곧 모든 것이 허무하게 흩어졌다. 그녀의 대답은 그저 또 하나의 환상 속 질문이었고, 그들이 놓인 상황의 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PsID:AB:73.174 time= 1100000010101100 1011011110010001 1101010101011000 1011001010010100 100000 1010110111111000 1011001100000000 1100011101011000 100000 1100010110111100 1010110101110100 1100011101000100 100000 1011100111001000 1100100011111100 1011110011110100 1011101001110100 101100 1010 1010 1011000010110100 100000 1011100111001000 1100011101001100 100000 1100010111101101 1100001011011100 1011001111000100 100000 1010110111111000 1011001100000000 1011100101111100 100000 1101010110100101 1101010101011100 100000 1100000010101100 1011011110010001 1100010111010000 100000 1011010110101000 1011100110101100 1011010011101111 100000 1011110011110100 1011001011110101 1101010101101001 1011001011001000 1011001011100100 101110 밀리초.'

폴의 주변은 더 이상 우주의 무중력 속을 떠도는 공허한 공간도, 환상의 물결 속도 아니었다. 요정들의 성도, 바다도, 아름다운 로즈의 집도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이 지워진 자리에는 기묘한 무형의 공간만이 남아있었다. 폴은 그 안에서 고통에 몸을 뒤틀며, 절규하듯 신음했다. "안돼... 제발... 살려주세요... 신이시여, 나를 이 끝없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 신이시여, 안식을... 너무 아파. 너무 아파! 아파요..! 더는 못 버티겠어. 죽고 싶어... 제발, 제발... 안식... 내 목을 뽑아서 부숴.. 죽음만이 나를 자유롭게 할 수 있어...!" 그의 말은 절박하게 이어졌다. 목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갈라져 나오는 목소리에서조차 고통이 스며 나왔다. 그의 몸은 점점 허물어져가는 것 같았고, 정신은 이미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폴의 눈앞에는 책의 표지가 보였다. 그 표지 안에는 하나의 나무가 서 있었다. 그 나무는 마치 이 세상 모든 생명의 정수를 빼앗긴 듯 말라비틀어진 채로, 그곳에 홀로 서 있었다. 가지들은 마치 허공에 찔리듯 뻗어 있었고, 껍질은 오래된 세월에 깎여 나가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메마른 나무의 뿌리처럼 그의 마음은 더 이상 어떤 땅에도 뿌리내릴 수 없었다. 그 나무는 색을 잃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용히 꺼져가는 불씨처럼 힘없이 서 있었다. 그 나무의 잎은 오랜 가뭄 끝에 모두 떨어져 나갔고, 살점이 떼어내진 것 같은 비틀린 가지들만 남아 있었다. 가지 끝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마저도 금방 사라졌다. 그러니까.. 제이크에게는 꿈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어쩌면.. 이게 더 나은 결말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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