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견이 인생에 끼치는 파급력
반려견을 키우면 잃는 것이 많다.
여전히 내가 나 자신의 반려견을 키우기 꺼려하는 것은 바로 반려견에 의해 얼마나 많은 것이 바뀌는 지를 명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잃는 것이 있는 만큼 얻는 것이 많고 그렇기 때문에 일상 루틴이 변한다.
그 말은 즉, 책임이 따른 다는 것이다.
만약 반려견을 키우는데도 일상 루틴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건 평소 갓생을 살아왔거나
혹은 반려견에게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이다.
반려견과의 이별에 대한 빈자리가 유독 버티기 힘든 이유는
그에 의해 일상의 모든 것이 변해있었기 때문이다.
바뀐 루틴
소문난 게으름뱅이가 있다. 데일이의 이모부. 그러니까 필자의 부친은 움직이는 것을 정말 싫어한다. 집돌이에다가 집에서 책 읽고 공부하는 것만 좋아하는 사람이다. 운동하라고 수영장을 끊어줘도 헬스장을 끊어줘도 작심삼일이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데일이가 없었다.
“엄마, 데일이 어디 갔어?”
하는 말에 엄마가 베란다를 가리켰다. 베란다 창문 너머에 익숙한 풍채 둘이 걸어가는 것이다. 데일이와 아빠. 와…. 저게 뭐야… 뭐야?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한참 동안 인지부조화가 일어났다. 아빠가 데일이와 산책을 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바꾸는 건 쉽지 않다. 그리고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그랬는데, 이렇게 바뀐다고?
그저 집에 강아지 하나 들어왔다는 것이 고작 달라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곱씹어보자니 생활 루틴이 완전히 바뀌었다. 고작 강아지 하나 덕분에 아침에 눈뜨는 것이 행복했다. 혹여나 나 때문에 데일이 잠을 못 자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늦은 새벽까지 느릿느릿 이것저것 하며 시간을 때우지 않았고 일찍 자려고 노력했다. 집 안에 큰 소리는 더더욱 줄어들었고, 학교 가는 것이 싫었다(?) 아니… 사실 학교 친구들에게 데일이를 자랑하고 싶어서 학교에 더욱 가고 싶었다. 다행히 친구들이 전부 강아지를 좋아해서 데일이 사진을 보며 신기해했고, 실제로 보러 오기도 하고 그랬다.
이때는 몰랐는데, 이때 같은 반이었던… 그리고 이때 데일이에게 관심 많았던 친구들은 전부 현재 반려인이다. 다들 이제 6-7살쯤 되었다.
바뀐 관점
그리고 또 바뀐 것이 있었다. 집 앞 과일 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 ‘순둥이’라는 진돗개가 있었다. 사람이 지나가도 얌전했고, 착했다. 주인에게 물어보니 이름이 ‘순둥이’랜다. 오… 진짜 이름 값하네. 순하다.라고 생각했는데.
데일이가 산책하며 지나갈 때마다 짖어대는 것이 아닌가. 사람 한정 ‘순둥이’ 였다….
어쩔 수 없는 일
집 앞의 길이 좁다. 아마 문제견이었으면 산책하기 어려운 길이었을 테다. 데일이는 순했고, 그래서 사람들이 지나갈 때면 옆에 바짝 붙어서는 먼저 지나가시라고 기다리고는 했다.
학교 마치고 데일이랑 같이 집으로 오는 길, 멀찍이 아주머니의 표정을 보니 개를 무서워하는 것 같았고. 그래서 데일이를 당겨서 골목 안쪽으로 붙었다. 데일이의 몸을 가린 채, 한참을 기다리고 있는데 안 나오시는 것이었다.
“먼저 지나가세요”
하며 더욱 벽에 붙자 세상 구겨진 찌그러진 캔 같은 표정으로 ‘쯧. 저걸 왜 데리고 다녀서는…’하는 것이 아닌가.
개를 싫어하는 사람은 분명 존재한다. 나도 어릴 적 친구 집의 성질 나쁜 시츄 때문에 꽤 오랫동안 개를 무서워한 적이 있었다. 다만, 주인이 제대로 간수한다면 나에게 해를 입히지 않았고, 그가 강아지를 키운다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왈가왈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비관적이지는 않았다. 해가 되는 반려견을 간수하는 것은 보호자의 몫이다. 키울 수 있지만, 타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했음에도 개의 존재에 불만을 품는 사람은 사실 어떻게 해도 관점을 바꿀 수 없는 사람이다. 피해 다니고, 만나지 않도록 바랄 수 밖에 없다. 낡고 오래된 관습이나 고착화된 생각을 바꾸기는 어렵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 또한 이해하는 바이다. 무섭고 싫은 것을 어찌하란 말인가. 내가 그들의 트라우마나 공포심을 치료해 줄 수 없기에 그저 나의 반려견을 더욱 단속시키고, 조심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다.
미움받을 용기
지나가다가 “똥개다 똥개”하는 아이들의 입을 간수하지 않는 부모, 얌전히 지나가는 개를 흘끗흘끗 쳐다보며 “저런 걸 왜 키우냐”하는 못 배운 어른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참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이 또한 내가 배운 것이었다.
특정 행동을 하지 않아도 욕을 하는 사람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내 잘못으로 욕을 듣는 것이라면 고치면 되지만, 고칠 것이 없는데 욕을 하는 사람은 그저 욕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요즘 여러 플랫폼에는 익명성에 숨어 악플을 다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질투받을 만한 사람이나 구설수에 휘말릴 것 같은 사람들이 몇몇 있다. 그런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 중에서 ‘와 이 사람을 욕하는 사람이 있을까…’하는 사람이 있다. 밝은 이미지에 선한 영향력, 딱히 결점 없어 보이는 행보. 하지만 분명 어딘가에는 트집이 있고 악플의 비율은 동등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예쁘고 착해도 범법을 저지르지 않아도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