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장벽은 개나 줘’ 에 해당되지 않는 ‘개’입니다-
가끔은 안타깝기도 했다.
아이들이 아이다워야 하듯이, 데일이 또한 개처럼 굴었으면 했다.
적응을 못해서 전전긍긍하고, 짖기도 하고, 낯설어하기도 하며 사람을 골탕먹이길 바랬다.
웃기게도 오히려 내가 적응을 못했지, 데일이는 월등하게 적응한다.
데일이가 낯선 상황에 적응을 잘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정답은 : [보호자에 대한 믿음]이었다.
보호자가 있는 곳이면, 보호자와 함께라면, 보호자가 데려다주는 곳이면, 보호자와 친한 사람이라면. 모두 안식처와 다름없었다. 생존을 위한 전략이었을지라도, 믿음이라는 것이 그렇게나 중요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 엄마
“데일아 이모말 잘 듣고 있어. 여기에서는 이모가 엄마야 알겠지?”
그 애는 반짝 거리는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에이 이모 사람도 아닌데 말을 어떻게 알아들어요.
아- 데일이는 말을 알아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말이 통한다는 것이었다. 또 처음에는 내가 말할 때면 나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물 먹어!”
그러면 가만히 쳐다본다. 그러다가 내가
“고 겟 썸 워터!(Go get some water!)”
하면 골똘히 생각하다가 물 마시러 가는 것이 아닌가. 그다음부터 '물 = 워터' 라는 것을 인지했는지, ‘물’이라고만 하면 알아서 물을 마시러 간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데일이는 ‘말을 잘 듣는 강아지’가 아니라 ‘말을 알아듣는 강아지였다’
눈치만이 아닌 말을 알아듣는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있다. 이모는 데일이를 두고 외출을 해야 할 때, 영어로 ‘데일아 엄마 지금 볼일 있어서 밖에 갔다 올 테니까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아이 착하다~ 코코낸내하고 집에서 쉬고 있어 알겠지? 엄마 1시간 뒤면 올 거야. 착하지. 굿보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데일이는 침대 위에 털썩 앉아서는 손을 몇 번 핥아주고는 쿠션 위에 엎드린다. 마치 ‘그래~ 조심히 다녀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모가 미국으로 가기 전 엄마가 도전해 본 적이 있었다. 비슷한 높낮이, 하지만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읊조리니 데일이는 손을 핥아주기는커녕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벌떡 일어나서는 현관을 나가는 우리를 다급하게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결국 이모는 엄마의 폰에
‘데일아 엄마 지금 볼일 있어서 밖에 갔다 올 테니까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아이 착하다~ 코코낸내하고 집에서 쉬고 있어 알겠지? 엄마 1시간 뒤면 올 거야. 착하지. 굿보이~’
의 영어버전을 녹음했다. 맞다… 데일이가 우리 집에 머무르는 몇 개월 동안 외출할 때마다 이 녹음을 틀어줬다… 그러면 데일이는 나 또는 우리 엄마의 손을 핥고는 취침에 들어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데일이의 진기명기한 유튜브 채널이라도 만들 걸 그랬다. 내가 수험생이라 불가능했겠지마는…
이모가 미국으로 가면서 우리 집에는 덩그러니 데일이만 남았다. 이모가 짐을 싸기 시작하자, 데일이는 불안한 듯 이방 저 방 왔다 갔다 거리며 자신의 짐까지 챙기려고 한다. 하지만 이모가 데일이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이모 말 잘 들어야 해. 여기서는 이모가 엄마야. 알겠지? 엄마 금방 갔다 올게”
하며 영어로 말하자, 데일이는 쩝쩝 거리며 입맛을 다시더니 소파에 털썩 앉았다. 이모가 가고 난 다음에 막상 어떻게 해야 할지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우위를 점하는 서열 싸움이.
Dale VS 우리 엄마
‘개는 훌륭하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와 같은 반려견을 위한… 반려인을 위한… 프로그램이 성행하는 요즘에는 잘 키우는 법과 훈련시키는 법이 정형화되어 있다. 인터넷에 찾으면 대부분 비슷한 방식을 권장하고 그렇게 키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데일이가 한창 성장할 때만 해도. 게다가 미국태생인 조건까지 고려하였을 때 우리나라에서 권장하는 방식과 전혀 다르게 키워졌다. 데일이는 이모와 이모부로부터 사람 아기처럼 키워졌다. 그러다 보니 반려견 반려인이라는 개념보다는 부모-자식의 개념이 더 우월한 것이다. 데일이는 배변패트 없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았고, 화장실을 가고 싶으면 보호자를 불러 함께 동행했다. 배변을 닦아주고 처리해 주면 그제야 화장실에서 나오는 사람 아기 같은 느낌이었다. 음식 또한 다른 개들과 달랐다.
‘언니, 우리 데일이는 사료 안 먹어. 시져스에서 나오는 통조림만 먹어’
엄밀히 말하자면 이모는 데일이와의 기싸움에서 패배한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이모의 언니, 즉 우리 엄마는 말했다.
‘통조림 밖에 못 먹는 게 어디 있냐. 안 줘서 그렇지.’
데일이의 이모, 다시 말하자면 나의 엄마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비싼 캔의 통조림을 주식으로 먹는 데일이에게 엄마는 사료를 건넸다. 처음에는 사료와 섞어서 주자, 통조림 고기만 홀라당 건져 먹고는 사료는 버리는 것이었다. 그다음에 엄마가 사료만 주자, 코로 그릇을 엎어버리는 것이었다. 필자의 엄마는 지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 정도 기싸움을 하더니, 데일이는 ‘이 이모는 못 이기겠다’라고 생각한 것인지 사료를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데일이는 이모만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아마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제 이모를 든든하게 여기고 멋있다고 여기며 따르게 된 것이 말이다.
현재 반려견에 대한 이론에 꽤나 빠삭해진 필자의 머릿속 지식에 따르면 데일이는 여태 편식을 한 것이고, 엄마는 사료 훈련에 성공한 것이다.
‘와… 이모 겁나 멋있어. 이모가 대장해’
하며 생각했을 것이다. 추후에 데일이가 미국에 간 뒤, ‘이모’라는 소리만 들으면 귀가 쫑긋거리고 현관으로 나갔다고 한다.
이모는 데일이에게 제2의 엄마, 아니 어쩌면 엄마의 엄마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건 견주에게 가슴 아픈 일이긴 하지만, 3개월 정도 같이 지낸 후, 데일이는 제 엄마를 막 따라가다가도 이모가 장난으로 ‘데일아~ 넌 여기 있어’ 하면 쪼르르 달려가서는 자신의 대장, 즉 이모 옆에 딱 붙어 서는 것이 아닌가.
누나의 알람
아침잠이 많은 나는 알람소리를 아무리 크게 틀어놔도 잘 일어나지 못한다. 결국 엄마가 늘 흔들어서, 아니 억지로 일으켜서 화장실까지 집어넣어 주면 그제야 일어나고는 했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엄마는 부엌에서 밥을 하고 있었고, 그 모습을 아래에서 지켜보고 있던 데일에게 엄마가 말했다.
“데일아- 가서 누나 좀 깨워”
아마 이때까지 한국어를 잘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깨워’라는 말보다는 ‘누나’라는 말을 알아 들었을 것이다. 데일이는 챱챱챱 거리며 나에게 걸어왔다.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자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머리 위로 만세를 하며 자는 내 손을 혀로 핥기 시작했다.
촉촉함에 눈을 떴다. 눈 앞에 데일이가 보였고 웃으며 그 애의 이마를 쓰다듬자, 임무를 다했다는 듯 쿨하게 몸을 돌려 다시 대장에게 가버린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웃으면서 일어났다. 한참 예민해질 시기 고2, 늘 잠이 부족했고 또 잠이 많았기 때문에 아침에 한 번도 기분 좋게 일어난 적이 없었다. 처음이었다. 그렇게 기분 좋게 일어나는 것은 말이다.
이날부터 데일이는 우리 집의 ‘누나 깨우기 담당’이었다.
평화주의자
에피소드 하나만 더 풀어볼까.
이 에피소드는 데일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내가 가장 먼저 꺼내는 에피소드이다.
친할아버지 제삿날이었고, 고3으로 올라가는 고2 겨울 방학이라 가족들이 집에서 공부하게 허락해 주었다. 우리 가족은 내가 ‘아기’인 줄 안다. 사실 아직까지도 말이다…. 집에 혼자 두면 불안해했다. 나는 이런 부분이 조금 짜증나기 시작했는데, 마침 데일이가 있으니 안심된다며 엄마 아빠가 나를 두고 가는 것이 아닌가. (원래 반대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있으니 안심되니 데일이를 두고 가야 하는 것이 아닌지…)
아무튼. 같이 있었던 이 에피소드는 추후에 또 글로 남길 테지만, 이러한 연유로 부모님이 할머니 댁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 늦은 저녁에 오게 된 것이다. 아빠는 성격이 불 같다. 하지만 불 같으면서도 뭔가 재빠르지 못한 행동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늘 행동하기 전에 화를 내고 시작하는 것이었다. 반면 엄마는 융통성의 여왕이었다. 공부는 아빠의 주특기이지만, 생활력은 엄마의 주특기였다. 어찌 싸웠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할머니 댁에서 출발하기 전에 싸우는 바람에 자동차가 어느 기둥에 긁혔고, 그것 때문에 집에 와서 싸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뭔 일인지는 모르지만, 언성이 높긴 해도 엄마와 아빠는 서로 이야기를 하며 풀고 있었기 때문에 별 신경은 쓰지 않았다. 도통 알아듣지도 못하고 이상한 분위기에 불안해할 데일이를 안고 안방으로 들어가서는 텔레비전을 보았다. 데일이를 안고 빈둥거리며 누워서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자, 안겨 있던 데일이가 낑-끼잉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닌가.
내려가고 싶나 싶어서 낑낑 거리는 데일이를 바닥에 내려주니, 침대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보며 낑낑 거리며 궁뎅이를 씰룩 거린다.
“왜 그래?”
하며 다시 텔레비전을 보자, 이젠 뒷발을 콩콩 치며 아이들이 투정 부리듯이 찡얼거린다. 우…우와! 나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하필 스마트 폰은 싸우고 있는 엄마와 아빠에게 있었고, 나는 당시 공부하겠다며 2G 폰으로 바꿔서 동영상 촬영도 할 수 없었다. 기록에 일가견 있는 나는 준비 안된 카메라맨인 나 자신을 자책하며 데일이를 웃으며 보았다.
그러자 더 소리를 높여 짜증 내는 것이 아닌가. 화장실 가고 싶니? 하며 화장실을 데리고 갔지만 데일이는 미동도 없었다. 마침 일어난 나를 양처럼 몰고 가는 것이 아닌가. 아 맞다. 데일이는 셔틀랜드 쉽독…. 쉽! 독! ‘Sheep Dog’ 그러니까 양몰이를 잘하는 개였다. 몸 속에 어렴풋이 숨어있는 양치기 개의 유전자를 발현한 데일이는 나를 방으로 몰고 갔다.
그곳은 엄마 아빠가 싸우고 있는 방이었다.
“아.. 아. 데일아 이모랑 이모부는 그냥 대화중인 거야. 걱정 마. 다시 누나랑 텔레비전 보러 가자”
하며 몸을 돌리자, 그때는 코로 내 다리를 밀며 더 짜증을 내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 성화에 못 이겨 방에 들어갔다. 내가 방에 발을 들이자, 데일이는 그제야 그 문턱을 넘어서는 이모와 이모부 사이에 떡- 하니 섰다.
싸우고 있던 엄마와 아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울그락 불그락 거리며 대화 중이었지만, 중간에 떡 하니 서서는 제 이모와 이모부를 번갈아 쳐다보다가는 제 앞발을 이모와 이모부에게 톡 올리는 데일이를 보더니 푸하하 웃는다.
“아이고. 우리 데일이 이모부랑 이모 싸우나 싶어서 왔구나. 우리 이제 그만하자”
“그래. 이모랑 이모부가 잘못했네! 나가자! 데일아!”
데일이는 나를 휙 쳐다보며 위풍당당하게 방을 빠져나왔다. 마치
‘누나~ 싸움은 이렇게 말리는 거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그때 깨달았다. 가끔은 딸보다도 애완견이 나을 때가 있다는 것을.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항상 딸보다 애완견이 낫고, 가끔 딸이 나을 때가 있는 것이다.
집에 들어온 가장을 반겨주는 건 애완견 밖에 없다는 말이 있다. 그에 200% 공감하는 바이다. 어쩜 강아지들은 그리도 순수한 것인지. 나는 늘 생각한다. 나 또한 이 아이들처럼 순수하고 맑았다면 얼마나 좋았을지 말이다. 누군가에게 상처받아도 결국에 사랑을 줄 수 있는 아주 위대한 존재인 것이다. 상처받으면 마음을 닫고 벽을 쌓고 그래서 그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을 무서워하는 나는 얼마나 하찮고 비겁한지 모르겠다.
데일이를 보며 이렇게 깨달으면서도 나는 도저히 데일이를 본받을 수 없는 것이다.
데일이는 사람의 손에서 길러지는 애완견이지만, 사실은 가르침을 주는 스승 그 이상이다. 굳이 이론서로 줄줄 풀어서 설명하지 않아도 개념을 정의하지 않아도 이 애는 자신의 행동으로 누군가를 바꿀 수 있는 존재가 아니던가.
나는 그래서 자꾸만 너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