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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탄소 원소가 내게로 왔어 3

by 고요한동산
모든 물질은 탄소로 이루어지고 탄소는 땅에서 공기로, 식물에서 동물에게로, 죽어서는 분해되어 다시 탄소로 온 세상에 퍼지니 모든 존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다.




할아버지 손잡고 동네마실을 많이 다녔다.

동네 할아버지들이 "못난이 왔나?" 하며 인사를 하면 "저 못난이 아니에요!" 씩씩대며 말대답을 했고 "못난 이니까 못난이라 하지~"하며 반응이 재미있어 계속 놀려댔다.


"할아버지 코 나와"

그러면 할아버지는 맨 손으로 내 코를 풀려 툭툭 털어내고 나서 바지에 쓱 닦았다.

'아 더러워'

할아버지 손에 묻은 내 콧물이 더러워 콧물 안 묻은 할아버지 왼손을 잡고 걸어갔다.


"봐래~~ 여기서부터 저 까지가 다 우리 땅이었다 아이가"

걷다 포도밭이 나오면 할아버지는 손으로 밭을 가리키며 늘 이야기했다.


"근데 지금은 왜 우리 땅 아닌데?"

"다 팔았다"

"왜? 나 포도 좋아하는데.. 팔지 말지"

"포도나무집에 한그루 심으면 되지"

"진짜? 할아버지 꼭 심어줘."

"그래. 포도나무 심자"


할아버지랑 동네 한 바퀴 돌며 쌀집도 가고 농약가게도 가고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다른 여러 가게들 열심히 돌며 시간을 때우고 집에 돌아오곤 했다.


아마 엄마가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집안일을 할 때면 할아버지가 나를 돌보며 그렇게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나 어렸을 때는 세탁기 없이 손빨래하고

외할머니가 다듬이돌에 두드려 다듬질을 했던 기억이 난다. 아궁이에 나무를 떼지는 않았어도 연탄보일러에 푸세식 화장실이 있던 집에 살았던 기억이 있으니 참 옛날사람이구나 이제야 깨닫는다.


나름 밀레니엄 시대 00학번으로 입학한 신세대였는데 나이 들고 보니 구시대 선사시대 조상 같은 느낌이 든다.


빨간 대문 왼쪽에 가죽나무가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었는데 10살도 더 된 나무라 했다.

우리는 여름에 옥상에 올라가 위로 뻗은 가죽나무 가지에서 가죽잎을 따서 초장에 무쳐 뜨끈한 밥에 비벼먹곤 했다.

학교 갔다 오니 가죽나무 옆에 앙상한 나무 하나가 심어져 있었다. 할아버지가 진짜로 포도나무 하나를 주워와서 심은 거다.


"할아버지, 여기서 진짜 포도 나요?"

"그럼, 포도나무에서 포도 나지 사과 나겠나?"

"히히 빨리 열렸으면 좋겠다"

앙상한 포도나무 한 그루가 옥상 계단과 담을 타고 덩굴을 이루며 자라나기 시작했다.

앙상한 포도나무는 앙상한 가지를 뻗어 옥상을 칭칭 감고 앙상한 초록열매를 맺더니 곧 진짜 보라색으로 변했다.

"와! 포도가 진짜 열렸어. 할아버지! 포도 계속 키워요. 예전에 할아버지 땅만큼 포도밭만큼 크게요"

언니, 나, 동생, 엄마, 아빠, 할아버지, 옆집언니야들, 봉칠이 종갑이 까지 한 송이씩 다 먹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포도나무는 한 철 한 송이씩 맛 보여주고 말라죽었다.

매일 포도를 먹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나는 옥상에 엉겨 붙은 말라죽은 포도 가지를 보고 실망했다.

"저게 끝이야? 할아버지 다른 포도나무 주어와"

"아버님 더 심지마요. 옥상 지저분해요"

엄마가 미리 단도리친다.


할아버지는 동네 마실 갈 때마다 드넓은 포도밭만 나오면 "저기부터 저까지 다 우리 땅이었다" 하고 이야기했다.

"할아버지, 저 땅 다시 할아버지 땅 해. 다시 사"

"알겠다. 언젠가는"

학교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늘 마주하는 옛날 어마어마했던 할아버지의 땅은 영영 남의 포도밭이었다.


할아버지한테 천 원 달라고 했더니 엄마가 주지 말라했다고 용돈을 주지 않자 나는 할아버지 방 문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할아버지, 옛날에 할머니 고생만 시켰다고 엄마가 그랬어. 할아버지 나빠. 술 마시고 농사는 할머니 다 시키고..

옛날 할아버지 땅도 할아버지가 다 팔았다고 엄마가 얘기했어. 할아버지 바보"


어디서 들은 건지 기억은 나지 않는데 어린애 입에서 나왔으니 어른들 이야기하는 거 주워 들었던 모양이다.


동네 아줌마가 다 듣고 엄마한테 고해바쳤다. 딸이 시아버지한테 엄마가 그랬다면서 할아버지 욕을 그리 해댔으니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는가.

눈치가 없어도 없어도 그리 없는 아이였다 내가.


할아버지 장례식 끝나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문득문득 떠오르는 이 기억들은 나를 슬프게 했다.

할아버지는 꼬맹이가 자신의 과거를 들추며 비난하며 소리를 질러도 한마디 말도 안 했다.

사과하고 싶은데 사과할 대상이 없어 눈물이 났다.


성악설을 믿는다. 사람은 타고나길 악해서 잘 길들여야 한다. 나 꼬마 때 자기 말 안 들어준다고 고래고래 나쁜 말 하던걸 생각하면 타고나길 악한 존재임이 틀림없다.

내가 상처받는 일보다 남에게 상처 준 일은 각인이 되어 후회로 남는다. 그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선해질 기회를 주기 위해 각인시켜 주는 이 인간의 신비로운 프로세스가 가히 놀랍다.


빨간 대문 옆 가죽나무 나물무침의 군침 도는 매콤 달콤 새콤한 맛과 그 옆 할아버지가 날 위해 심어주었던 작은 포도 한 송이의 달콤한 맛이 입에 한가득 고인다.


50대의 할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하다.

저 깊은 기억은 잊어진 세월을 뚫고 맛과 냄새와 소리로 소환된다.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

탄소의 존재 말고 실물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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