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고리 권력’이라는 정치적 은어가 있다. 이는 최고 권력자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비공식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존재를 뜻한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문고리 권력은 늘 존재해왔다. 그런데 왜 하필 문고리일까? 문을 열려면 문고리를 당기거나 돌리거나 밀어야 한다. 설령 문 안에 대통령이 있다 해도, 문고리를 잡고 있는 이의 허락 없이는 그 문을 열 수 없다. 대통령을 알현할 수 있는 열쇠, 바로 그 문고리를 쥔 사람이 곧 문고리 권력인 셈이다. 어쩌면 이런 맥락에서 2인자인 국무총리보다 대통령실 비서가 더 실세일 수도 있겠다.
우리 집에도 문고리 권력이 존재한다. 최고 권력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인간들 중에서는 단연 누나 인간이 1위다. 물론 집 전체의 주인은 나, 앵무새 구름이다. 하지만 인간들 사이의 권력 서열을 굳이 따져보자면, 누나 인간이 최고 권력자일 수밖에 없다.
왜냐고? 간단하다. 누나 인간은 집안일이라곤 손톱만큼도 하지 않는다. 밥이 차려지면 나와서 먹기만 하고, 치우는 건 엄마 인간 몫이다. 방 청소도 기분이 내킬 때만 하니, 앵무새인 내가 봐도 참 태평스러운 팔자다. 그런데도 종종 짜증을 내며 엄마 인간과 아빠 인간을 쩔쩔매게 만든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 누가 봐도 그녀가 권력 서열 1위라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최고 권력자인 누나 인간과 어떻게 가까워질 것인가이다. 그녀는 너무 까칠하다. 나를 귀여워하는 듯하다가도 갑자기 내팽개치고 가버리기 일쑤다.
그다음 권력자는 아빠 인간이다. 누나 인간은 엄마 인간에게는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내도, 아빠 인간 앞에서는 왠지 말을 아낀다. 그래서 나는 아빠 인간이 권력 서열 2위라고 판단했다. 아빠 인간의 권력에 붙어 있는 건 쉽다. 매일 아침 화장실로 향하는 그의 습관을 파악하면 된다. 아빠 인간은 나를 절대 데리고 들어가지는 않는다. 화장실 문이 닫히고, 아빠 인간은 괴상한 소리를 낸다. 화장실에서 궁시렁대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 또 변비가 생겼나.”
변비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빠 인간을 괴롭히나 보다. 나중에 변비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지만, 앵무새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단어이다. 나는 아빠 인간이 나올 때까지 화장실 문고리에 앉아 기다린다. 아니 이렇게 문고리에 앉아 있으면 다른 식구들이 들어갈 수 없으니까, 내가 보초를 서고 있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누나 인간이 샤워하러 욕실에 들어갔다. 경쾌한 물소리와 음악이 흐르는 동안 나는 욕실 문고리에 앉아 기다렸다. 누군가 욕실로 들어가려면 나를 먼저 거쳐야 하는 상황. 그때 문득 깨달았다. 이제야 내가 진정한 문고리 권력을 잡았다는 사실을!
“구름아, 어디 갔어?”
엄마 인간은 나를 찾아다니며 숨바꼭질을 하는 듯했다. 결국 날 찾지 못하고 불안한 표정으로 현관문까지 열어 복도를 서성였다. 혹시 아까 현관문을 열고 택배 물건을 찾으러 나갈 때 내가 현관 밖으로 날아가지 않았는지 걱정되어 그럴 것이다. 그날따라 숨박꼭질이 더 스릴있게 느껴졌다.
마침내 누나 인간의 샤워가 끝났는지 물소리가 멈췄다. 문이 열리는 순간, 그녀의 외마디 비명이 울려 퍼졌다.
“엄마야!”
깜짝 놀란 나는 본능적으로 푸드덕 날아올라 방문 위에 자리 잡았다. 엄마 인간이 달려왔다.
“왜 그래?”
“문을 열고 나오는데, 문고리에 뭔가 말랑한 게 있었어! 놀라서 죽는 줄 알았어.”
“아, 구름이가 거기서 너 기다리고 있었나 보네.”
“정말? 구름이가 나를 기다린 거야?”
“응, 그런가 봐. 아무리 찾아도 없더니 여기 있었네.”
이제 화장실이든 욕실이든 문고리에 앉은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문을 열 수 없다. 이렇게 해서 나는 우리 집의 문고리 권력을 완벽히 차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