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자유를 맛보다
V가 거주하는 베를린 근교, 브란덴부르크의 S도시는 베를린 동쪽에서 40분밖에 걸리지 않으며 S반으로 쭉 이어진다. 한국에서도 경기도에 살았던 나는 어쩐지 한적한 경기도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본격적인 여름이 되자 V와 나는 가방에 수건과 먹을거리를 가득 채우고 동네 호수로 종종 향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보트를 타기도 했고, 물가에 돗자리를 깔고 바베큐를 해먹거나 시원한 호수에 몸을 담그고 놀기도 했다. 유럽은 밤늦게 해가 져서 10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온 적도 많다. 베를린에도 강이 있고 공원이 있지만 이런 여유는 대도시에서 벗어나야 맛볼 수 있는 재미였다.
타오르는 저녁노을이 호수에 비치던 멋진 순간, 백조가 다가와서 음식을 요구한 적도 있었다. 이렇게 동물들과 가까이서 지내는 삶이 점점 재미를 붙였고 벌레를 무서워하던 나는 조금씩 덤덤해졌다. 항상 대도시에서만 살고 싶어 했던 욕망이 소소한 자연의 매력을 느끼면서 사그라들었다. 자연에서 보낸 시간들은 꼭 베를린에서만 머물고자 했던 마음을 한껏 말랑하게 만들어주었고, 이후 내가 공부를 위해 바다가 있는 다른 도시로 떠나는 데 큰 역할을 해주었다.
V와 함께 자연에서 신선했던 또 다른 경험은 사우나와 FKK(Frei-Korper-Kultur) 해변에 간 일이었다. 독일에서 스파와 사우나는 남녀 혼성이며 사우나 안에 들어갈 때는 몸에 두른 큰 수건을 자리에 깔고 맨 몸으로 앉는다. 한국에서 자라온 나는 타인의 시선에 꽤나 예민했는데, 한국 지하철이나 공중화장실조차 마음 놓지 못하는 경계심이 있어서일 것이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남을 성적인 시선으로 쳐다보는 것이 무례하고, 어릴 때부터 이성의 몸을 자연스럽게 대하기 때문에 모두가 함께 사우나를 즐길 수 있다.
포츠담 근교에 있는 사우나에 방문했을 때는 심지어 V 친구 O도 함께였다. 다 같이 뜨거운 사우나 안에 앉았을 때는 '제발 나가고 싶다..' 생각만이 머리에 가득차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다 같이 맨 몸으로 풀장에서 칵테일을 마셨고, 뜨거운 사우나에서 열기를 쐬었고, 커다란 강 앞에 앉아서 음악을 들으며 아기 오리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FKK 해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성적대상화에서 자유롭고 그저 태닝과 수영과, 각자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뿐이었다. 나는 한국에서는 입지 못했던 비키니를 처음 입어보았고, 이후에는 비키니조차 벗고 해변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그대로 받기도 했다. 한 마리의 바다사자가 된 기분이었다.
이렇게 사우나나 FKK해변에서는 사진 찍는 것이 매우 조심스러워 사진이 없다. 그런데 인증샷에 의미를 두지 않고 나의 즐거움과 몸의 자유에 집중하다보니 그 무엇보다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자연을 향유하고 구경하는 것보다 그 속에서 의미없는 즐거움을 찾게 된 날들이었다. 더불어 네모난 핸드폰 화면 속 엄격한 잣대에서 벗어나 나의 몸을 긍정하게 되고 그대로 바라보게 되는 순간도 함께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