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커플의 의사소통 오류
어학원에서 시간이 갈수록 레벨은 올라갔지만 C1까지 실력이 오르려면 실제로 몇 년을 더 쏟아부어야 가능할 터였다. 언어의 한계가 너무 명확해 처음부터 V와 나는 영어로 대화했다. 학원에서 분명 B2까지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어로 전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 친구들을 만날 땐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V 친구들을 만날 땐 소외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들이 나를 위해 영어로 가끔 말을 걸어주긴 했으나 나는 대부분 독일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상황이 반복될수록 나의 자신감은 사라졌고 위축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한국과는 다르게 독일에서는 새로운 사람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주지 않는다. 예를 들어 새로운 사람이 어느 모임에 나타난다면, 한국에서는 자연스럽게 그 사람이 모임에 잘 어울릴 수 있도록 질문하고, 분위기를 형성하고, 불편하지 않게 자리를 만들어준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새로운 사람에게 비교적 무관심하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먼저 도움을 요청해야 도와준다. 하지만 이런 문화가 나는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는 독일 사람들을 보며 오해했던 거였다.
- 무슨 말 하고 있어?
내가 V에게 이렇게 따로 물어봐야 한다는 사실이 어색해서 이것 때문에 많이 싸우기도 했다. V는 최대한 많이 나를 배려해주려고 하고, 나는 계속 물어보는 쪽으로 지금은 변하긴 했지만 아직도 조율해야만 한다.
또, 어떤 말을 할 때 독일인들은 결론을 마지막에 말한다. 한국 사람들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설명보다 결론을 앞에 말하는 반면, 독일인들은 설명을 다 하고나서 결론을 말하기 때문에 끝까지 들어야 한다. 그래서 듣고 있으면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라는 의문이 자꾸만 생긴다. 가끔 나는 이런 설명이 답답해서 V에게 "그래서 결론이 뭐야?"라고 먼저 물어보기도 한다.
한번은 V가 친구와 열심히 말하고 있길래 들어봤더니 '빵에 누텔라를 발라먹을 때 버터도 같이 바르는 게 좋을까'라는 주제로 20분을 얘기하고 있었다. 역시 토론을 좋아하는 독일사람들은 말이 많구나..라는 생각을 더해줬던 에피소드였다.
그리고 독일인들은 "아무거나 괜찮아."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어떤 메뉴를 정할 때는 주로 상대를 배려해서 "나는 아무거나 다 좋아."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여기에서 저 말을 하면 상대가 혼란스러워한다. 그래서 연애초반에 V가 음료수를 사 온다며 뭐 먹고 싶냐고 물어봤을 때 나는 "아무거나 사 와."라고 말했더니 뭘 사와야할지 정말 어려워하는 거였다. 독일에도 "Egal(상관없어)"이라는 단어가 있지만 이럴 때는 통하지 않는 듯하다. 이렇게 일상부터 사회생활까지 내가 원하는 바를 확실히 말하고 전달해야만 한다는 게 초반에는 피곤했지만, 상대가 덜 오해하게 하는 직설법 중 하나라는 걸 인정하고 천천히 적응하는 중이다. 독일에서는 확실히 내 의사를 전달하는 게 배려니까.
여담으로 V는 내가 오렌지 주스를 먹고 싶다고 했을 때, 마트에 가서 오렌지 알갱이가 들어있는 주스가 좋을지 없는 게 좋을지 고민하다가 아예 안 사온 적도 있다. 그땐 오렌지 주스를 사 오지 않아 참 섭섭했던 일화. 지금은 아무거나 대충 사 오는 V지만 이런 문화차이에 서로 소통하는 데 시간이 꽤나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