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 뿌리 기르기
나이 먹는 것에 무감각하다. 쓰면서 생각해 보니 왜 나이에는 유독 ‘먹는다’는 표현을 즐겨 사용할까?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다, 나이를 더 먹어야겠네, 나이 한 살 더 먹었으니 등등. 음식을 먹어서 영양분을 얻고 살과 피를 얻듯이 나이도 먹으면 먹기 전과는 다른 무언가를 얻게 되는 것일까. 하지만 중년의 나이에 가까워지고 보니 먹는 나이만큼 얻는 ‘무언가’가 비례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사람들은, 특히 여자들은 나이 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나이 든다는 것은 결국 노화, 즉 늙는다는 현상을 뜻하고 사회적인 의미로써의 여자의 노화는…'넌 그윽한 매력을 곧 상실하게 될 거야’라는 여성성의 종말과도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나는 그토록 어른의 미래를 바라왔으면서도 마흔 살이 될 나를 두려워했다. 아니, 마흔이 된 나를 상상할 수 없었다. 초등학생의 눈에 비친 40대는 생기가 하나도 없이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대파 줄기 같았다. 나도 40대가 되면 삶의 의지를 잃어가겠지. 그리고 물이 반쯤 담긴 컵에 양파를 담가 양파 뿌리나 기르면서 그걸 보며 기뻐하는 나날을 보내게 될까. (아마 TV에서 양파를 기르는 중년의 주부를 보았던 모양) 고작 양파의 하얀 뿌리를 보며 작게 탄성을 지르는 삶을 살기 위해 내가 지금 이 지난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거야? 어른이 되고 싶으면서도 더 나이 든 어른은 되기 싫은 모순된 상황.
그러나 법적인 의미의 어른이 되고 직접 내 삶을 살아내어 보니 인생은 양파 뿌리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나를 죽고 싶게 만드는 것들은 분명 있었지만 환희에 가득 차 들뜨게 만드는 것들도 많았다. ‘이런 지긋지긋한 삶’과 ‘살아볼 만한 삶’ 사이를 오가는 숱한 시간들을 보내고 나니 어느덧 그토록 두려워하던 40대가 되었다. 나는 과연 양파 뿌리를 기르게 될까. 그리고 작게 신음하며 기쁨을 토해낼까.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내 안에서 나는 한참은 나이를 먹은 듯한데 아직도 내 나이 앞에 4라는 숫자가 붙어있다는 것. 그렇게 살고 또 살았는데 여전히 50도 안되었다는 것이. 사실 ‘네 나이를 스스로 규정지어보아라’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나는 지금 한 58살 정도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없다. 내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다. 큰 사건 사고는 없었지만 자잘하고 소소하게 감정의 기복과 마음의 풍파를 겪어왔다. 그 안에서 나는 조금씩 단단해졌고 해마다 껍질이 벗겨져 새 살이 돋았다. 벗겨진 껍질은 각질처럼 내 발밑에 수북이 쌓여있고 그건 한때 나였던 것들이다. 곧 60을 앞두고 있는 듯한 느낌인데 여전히 내 나이 앞엔 4라는 숫자가 붙어있다니, 이질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40대에 접어든 요즘, 컵에 물을 담아 양파 뿌리를 기르지는 않는다. 다만 나는 나를 기르고 있을 뿐이다. 나를 닮은 두 아이가 있지만 명목상의 육아일 뿐 사실은 그 아이들을 통해서 스스로를 다시 기르고 있다. 내 한 몸을 먹이고 누이고 재우면서 나를 책임지는 삶을 살아내고 있다. 나이를 먹는 것은 그런 것이다. 양파 뿌리를 길러내는 것처럼 나를 기르는 것. 날마다 돋아나는 하얀 양파 뿌리를 보며 아주 소소하게 감탄하듯 매일 자라나는 나를 보며 감탄한다. 어쩜 이렇게 매일 정성을 쏟아도 나아지는 게 이것뿐일까, 오늘도 뱉어내는 다른 의미의 감탄. 그럼에도 나이를 먹어가는 나에게 끝까지 비바람을 막아낼 조그마한 우산을 씌워준다. 비록 상처투성이지만 오늘도 뿌리가 돋아났구나! 경탄하는 동안 이번에도 껍질이 벗겨져 새 살이 돋아났다. 발 밑이 하얗게 수북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