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짓 거 평생 먹으면 돼
한 곳의 신경정신과를 꾸준히 다닌 지도 벌써 3년 가까이 되어간다. 그 시간 동안 병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끊어보려는 나의 무지한 노력은 늘 실패로 이어졌다.
내 안의 풀리지 않는 많은 문제들을 풀어보고자 종종 신경정신과를 방문했었다. 어떤 곳에서는 항우울제를 지어주었고 또 다른 곳에서는 신경안정제를 지어주었다. 그걸 먹고 나면 나는 다른 사람으로 변하곤 했다. 마음이 갑작스레 평온해졌는데 왜 평온한지 알 길이 없는 사람. 여유 있는 미소를 띠고 있지만 미소를 멈출 줄 모르는 사람. 그런 모양새가 싫어 번번이 다니던 병원을 의사 선생님과의 상의도 없이 끊어버리곤 했었다. 나와 가까워지고 싶어서 방문했지만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았다. 가짜 평온함 속에서 끝도 없이 허우적거리기. 그것이 싫어 잘 먹던 약도 내 멋대로 끊곤 했었다.
지금 다니고 있는 병원은 조금 달랐다. ‘너에게 부족한 건 세로토닌이야’하며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를 처방해 주었다. 물론 이것 역시 항우울제의 일종이긴 하다. 먹어보고 심신의 변화가 없으면 맞지 않는 약이니 바꾸어보자는 첨언도 곁들이셨다. 의사 선생님은 꽤 가벼워 보였다. 진중하지 못한 가벼움이 아니라… 깃털 같은 사람이었다. 아하, 문제가 있어서 왔구나. 그런데 그거 별거 아닐걸? 물론 평생 약을 먹을 수도 있어. 그렇지만 그럼 뭐 어때. 까짓 거 평생 먹으면 돼지. 몇 개의 알약으로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데 방향을 잡을 수 있다면 그 정도는 감수할 만한 일이야. 의사 선생님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했다.
그렇게 시작된 정기적인 나의 병원행. 월 1회 방문과 2만 원의 진료비, 그리고 3만 원의 약값으로 나는 한 달 치 삶의 방향감각을 얻어간다. 그런데 방향키를 잃어버린 사람은 생각보다 많은 모양이다. 주중에 가도, 주말에 가도 병원은 늘 방문 환자들로 바글거렸다. 그들 중 일부는 축 쳐져있고 일부는 평온했으며 또 다른 일부는 초조해했다. 신경정신과마다 진료대기실의 모습은 천차만별이다. 전체적으로 무기력한 분위기도 있는 반면에 이곳은 커다란 TV화면에서 끊임없이 예능 프로그램이 나오며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꼿꼿하다. 병원의 특성상 때때로 보호자들이 함께인 경우도 있다. 대기시간이 길어지면 보호자들은 견디기 힘들어하지만 정작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 본인들은 자세가 더욱 반듯해진다. 마치 이런 날을 기다려왔고, 더욱 강직해지리라는 듯이.
기본적으로 1시간 이상 대기를 하는 편인데 그동안 책을 읽으려고 가방에 책 한 권을 담아왔지만 정작 읽은 경우는 별로 없다. 조용하지만 책에 집중하기 힘든 묘한 에너지가 있다. 긴 시간을 멍 때리고 앉아있게 만드는 희한한 분위기. 오히려 이 진료대기 시간이 나를 문제 있게 만들어 진료를 더욱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것 아닐까, 의심될 정도이다. 긴 대기시간을 거쳐 내 이름이 불리면 긴장되고 반가운 마음으로 깃털 같은 의사 선생님을 만나러 진료실로 들어간다.
“지난 한 달 동안 어땠어요? 괜찮았어요?”로 시작되는 가벼운 질문. 내 머릿속에서는 열심히 바퀴가 굴러간다. 한 달간 나의 정신머리는 어떠했는가. 나는 삶의 주도권을 잘 잡고 지냈는가. 거기에 이 병원의 약은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가. 이 모든 생각을 간파한 듯이 깃털선생님은 ‘네가 어떻게 살았던 중요한 건 다시 시작될 앞날이다’라는 눈빛을 던지며 헤실헤실 웃으신다.
한참 동안 깊은 물속에 빠져 웅크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물속에 있다 보니 아가미라도 생긴 것일까. 숨을 쉬지 않아도 그럭저럭 버틸 수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밑으로 밑으로 침잠하여 물 밖은 어떤 곳인지 가물가물해졌다. 그러던 차에 병원을 만났고 약을 먹었다. 그러기 위해선 수면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어야만 했다. 물속에서 숨 쉬는 방법을 익혀가던 나는 다시 약을 삼키려 물 밖에서 숨 쉬는 방법을 깨쳐야만 했다. 약을 삼키자 깊이 가라앉던 몸은 수면 위로 동동 떠오르기 시작했다.
오늘은 물살을 따라 자유롭게 유영하며 햇볕을 쬐는 중이다. 가끔 던져지는 수면 위의 알약들을 삼키면 숨쉬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렇다고 물속으로 깊이 잠수하는 방법을 잊었냐면 그건 또 아니다. 나는 언제든 아래로 아래로 다시 침잠할 수 있지만 물 위를 떠다니며 즐기는 햇살이 꽤 따뜻하고 좋다. 그래, 평생 먹어야 한다면 먹어보자. 그리고 내 몸은 점점 깃털로 변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