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등학교 1학년 때 내가 3층 주택에 산다니까 믿을 수 없다며 우리 집까지 따라온 까무잡잡한 피부의 남자애가 있다. 엄마는 친구를 데리고 왔다며 과자와 음료수를 주었고, 그 애는 대접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친하지도 않은 사이였는데 의문이다.
2. 초등학교 3학년 때 체육 시간이 끝나 교실에 들어왔다. 기운이 빠져 곧바로 내 책상 자리로 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물을 마시려 내 책상 위에 올려둔 하얀색 물통 뚜껑을 열어 물통을 기울이는 순간이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에 안을 들여다보니, 물과 함께 노란색의 모래가 절반 정도 들어있었다. 누가 넣어 놓은 건지도 모르겠고 너무 당황스러워서 물병의 뚜껑을 꽉 닫았다. 잠시 식었던 얼굴의 열기가 다시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타는 갈증을 참고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3. 초등학교 4학년 때 나라 수도만 외우는 남자애가 있었다. 청소 시간에 나는 복도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걔가 교실 창문으로 올라갔다. 그러더니 내 쪽으로 뛰어내리면서 빗자루로 위협을 했다. 영문을 모르던 나는 겁에 질려 황급히 그 자리를 피해 도망쳤다.
4. 초등학교 4학년 때 등교하자마자 나랑 말 한마디 한 적 없고, 짝꿍도 아니었던 남자애가 갑자기 내게 성큼 다가오더니 무슨 종이를 내밀었다. 자세히 보니 편지지였는데 나보고 “이거 네가 썼지?” 했다. 내용을 봤더니 ‘누구야 사랑해’가 적혀있었다. 누구는 그 남자애고 그 편지를 쓴 사람이 나라는 거다. 아니라고 했는데 글씨체가 내 글씨체라며 우겼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티격태격하며 소란스러워지자 같은 반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5. 초등학교 4학년 때 교내 합창단 오디션을 봤다. 교탁 앞에 서서 어머님 은혜를 부르다가 2절을 스승의 은혜로 잘못 불렀다. 난 몰랐는데 친구들이 웃어서 그때야 알아챘다. 합창단은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 알토 이렇게 세 그룹으로 나뉘었다. 나는 메조소프라노로 뽑혔다. 그때부터 교외 행사에 분홍색 저고리, 남색 치마로 된 생활한복을 입고 노래를 부르러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음악 수업 시간에 알토로 뽑힌 애가 자기랑 자리를 바꾸자고 했다. 나는 싫다고 했는데 이미 걔가 메조소프라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고 나는 어쩌다 보니 남은 알토 자리에 앉게 되었다. 고지식한 면이 있던 나는 선생님이 정해 준 대로하고 싶었고, 내 목소리와 어울리는 것도 메조소프라노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무시당했다는 느낌이 싫었다.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나는 참고 참다가 합창단을 안 하겠다 말하고 나왔다. 시간이 흘러 6학년 선배들 졸업 행사에 와야 한다고 했는데 합창단에서 나왔는데 내가 왜 가냐며 거절했다.
6. 초등학교 4학년 스승의 날 아침이었다. 케이크랑 과자, 음료 등을 선반에 놓고 반 아이들 전부 분주하게 풍선도 불고 선생님을 위한 깜짝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같은 반 남자애가 내 이름을 불렀다. 뒤돌아보는 순간 눈앞이 번쩍했고 나는 ‘뭐지?’ 하며 눈을 감았다. 내 손은 본능적으로 오른쪽 눈을 감싸고 있었다. 그 남자애가 내 오른쪽 눈 바로 앞에다 폭죽을 터뜨린 것이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같은 반 여자애가 나를 양호실에 데려다주었다. 다행히 눈 바로 밑 피부가 찢어져서 눈에는 이상이 없었는데, 놀란 마음에 많이 울었다. 집에 가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자 엄마가 그 남자애의 집 전화번호를 알아 오라고 했다. 다음 날 학교에 가서 그 남자애한테 말했더니 한 번만 봐주면 안 되냐는 둥 차일피일 전화번호 주는 것을 미루었다. 며칠 뒤 내게 집 전화번호를 알려주었고, 그 아이의 엄마가 전화로 주의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7. 초등학교 5학년 때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사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던 어린 남자애가 갑자기 내 쪽으로 비비탄을 쏴서 팔이랑 몸에 맞았다. 뭐라 하지도 못하고 난 뛰어서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나한테 왜 그랬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8. 초등학교 5학년 때 나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큰 단발머리 여자애랑 하굣길에 자주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며 친하게 지냈었다. 모델이 꿈이라고 했다. 키도 크고 뼈대도 얇았고 연예인 이나영같이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컸다. 집에서 병아리를 키운다고 했다. 이미 그 병아리들이 중닭으로 컸다고 했다. 나름 친한 사이였는데 어쩌다 사이가 멀어졌는지 모르겠다.
9. 중학교 2학년 때 주변에 몸이 마른 친구들이 많았다. 친구들처럼 예쁜 옷을 입고 싶다는 생각에 여름방학 때 무작정 2주 동안 물만 마시고 5kg을 감량했다. 그런데 그해 겨울방학에 다이어트 부작용으로 10kg이 쪘다. 발 크기가 키에 비해 큰 편인데, 그때 다이어트를 안 했더라면 키가 최소 5cm는 더 컸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10. 나는 중, 고등학교 체육 시간에 피구하는 걸 좋아했다. 상대편 진영에서 날아오는 공을 두 팔로 감싸 안을 때의 희열이 있었다. 던지는 힘이 부족했기에 받은 공을 세게 날릴 수 있는 아이한테 넘기는 조력자 역할을 했다. 존재감이 크지 않던 내가 피구하는 시간만큼은 에이스로 주목받는 시간이라 더 재미있었다. 그래서 그 시간이 항상 기다려졌다. 하지만 피구는 체육 점수를 더 받거나 하는 특별한 이득이 없는 놀이였을 뿐이다.
11.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피아노 학원을 꾸준히 다녔다. 자연스레 피아니스트도 꿈꾸게 되었다. 체르니 50번까지 쳤고, 어려운 악보를 보고도 쉽게 치는 수준이었다. 피아노 건반 위로 손가락이 자유자재로 날아다녔다. 대학 때 전공필수로 3학점짜리 피아노 수업이 있었는데, 중간에 공백이 있었음에도 6년간 배웠던 건 남아있었는지 그때도 좋은 점수를 받았다. 그 이후로는 집에 있던 피아노도 처분하는 바람에 더 이상 칠 수 없게 되었다. 피아니스트라는 꿈도 진작 사라졌다.
12. 어린이집 교사로 일을 할 때나 회계 사무원으로 일을 할 때의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신입사원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요령 없이 무작정 열심히 일했다. 어린이집 교사로 있을 때는 아이들 가르치는 행복과 그 아이들을 보며 얻는 에너지 때문에 버텼지만, 끝은 번아웃이었다. 회계 사무원으로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보이는 일에만 집중하기에 바빴고 몸이 버티지 못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사회적으로 경력을 이어가기엔 무리가 있었다. 빠르게 타오르던 열정은 빠르게 식었다.
13. 왜 내게 주어지는 것들은 쉬운 게 하나도 없는 걸까? 왜 항상 내게는 어려운 숙제만 주어지는 걸까? 왜 항상 나를 몰아붙이는 걸까? 왜 항상 나를 낭떠러지로 떠미는 걸까? 나는 왜 행복할 수 없는 걸까? 나는 왜 편해질 수 없는 걸까? 남들은 그냥 누리는 것들이 왜 내겐 욕심인 걸까?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시련을 주는 걸까? 이 시련은 끝이 있는 걸까? 고통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 막막함 속에서 나보고 어떻게 살아가라고 하는 걸까? 내게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걸까? 나를 도와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걸까? 왜 난 평생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가야 할까? 이게 숙명일까? 벗어나고 싶다. 진짜 너무 싫다.
14. 속이 썩어 문드러지다 못해 구멍이 뚫려있다. 이미 뚫린 구멍을 메울 수 없어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남들은 알지 못하는, 나만이 감당해야 하는 이 고통을 그냥 안고 살아가고 있다.
15. 마음껏 울고 싶다. 그냥 다 끄집어내고 싶다. 다 비우고 싶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이것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느껴야 하는 슬픔과 괴로움의 이유를 모르겠다. 나도 웃고 싶고 행복하고 싶다. 나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싶다. 마음 편하게 살고 싶다. 나도 남한테 의지하면서 살고 싶다. 나도 기대고 싶다. 욕심인 걸까? 남들은 쉬운 것 같은데, 나한테는 원해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걸 아니까 더 미치겠다. 괴롭다. 절망스럽다.
16. 나의 미칠 것 같은 외로움과 괴로움을 누가 알아줄까? 안다고 한들 해결책은 없다. 내가 감당이 안 된다. 나이가 들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고 그러는 걸까.
17. 미친 듯이 가라앉는다. 내려앉는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고 소리쳐도 저 밑에선 들리지도 않는지 반응이 없다. 모래성 뺏기 게임처럼, 더 이상 파낼 것도 없는데 계속 손가락으로 긁어낸다. 그러다 구멍 나겠어. 그만 좀 해.
18. 왜 나한테 이런 깊은 감수성을 준 걸까? 어디다 쓰지도 못하는데, 혼자만 괴로운데. 이미 상처가 많은데 나한테 줄 상처가 더 있는 건가? 어디까지 나를 몰아붙이려고 하는 걸까? 어디까지 버티나 시험하는 걸까? 이미 여러 번의 한계를 넘었지만 내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정말 암울하다.
19. 슬픈 노래 가사에 나를 대입시켜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서 겪지도 않았는데 겪은 것처럼 통증과 괴로움을 느낀다. 내 속에서 울컥 눈물이 튀어 올라 밖으로 끄집어내지는 그 과정을 계속 반복한다. 어느 순간 물밀듯이 눈물샘이 터지면 그때는 걷잡을 수 없다. 남들은 무슨 청승이냐고 할지 모른다. 근데 이렇게라도 안 하면, 감정을 억지로라도 끄집어내지 않으면 난 정말 미친다.
20.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한 번 터진 눈물은 멈출 수 없다.
21. 내게 혼자만의 시간은 눈물의 공간이기도 해. 아무한테도 내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22. 나에 관해 물어봐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나를 외롭고 슬프게 만들어.
23. 굳이 남들에게 입을 열지 않는 이유는 나는 이해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야.
24. 잘못된 길인 걸 알면서도 그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것은 멍청한 짓일까, 용기일까.
25. 다들 그러겠지만 누구보다 내가 더 중요하고 소중해. 이기적으로 살 거야. 다 필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