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맥씨 Aug 12. 2024

출국날 뜻밖의 휴가 하루+

& 비행기 안에서 2004.7

출국날이다. 대한항공 직항을 못 구해 경유하는 스케줄인데 운영사가 인천공항부터 델타항공이다.


후덥지근한 장마의 한가운데. 하루종일 비가 예정되어 있다. 기어이 공항까지 배웅하겠다는 딸들.


체크인하는데 오버부킹이라며 여정 변경 지원자를 찾고 있었다. 보상은 기프티와 내일 대한항공 직항이란다. 직항이 구미를 당겼다.


공항부근 호텔을 배정받고 체크인했다. 비가 가열차게 온다. 한 시간 반 운전하며 집으로 가는 것도 위험해 보였다. 룸을 스위트로 업그레이드하고 두 딸도 함께 있기로 했다.


룸이 쾌적하다. 빗줄기가 후려치는 통창밖으로 공항 장기주차장과 활주로와 주차해 있는 대한항공 비행기가 여러 대 보였다.


저녁식사는 뷔페식. 음식이 기대 이상이다. 맛있다. 식사 후 딸들은 각자 필요대로 운동과 밀린 일을 한다며 로비에 남았다가 늦게 올라왔다. 계획에 없던 하루 저녁 여유가 꽤나 좋다.


일찍 잠을 청했다. 요란한 빗소리에 자꾸 잠이 깼다. 내일 비행기는 뜰 수 있는 걸까.


아침 일찍 식사하러 로비로 내려갔다. 호텔 앞에서 공항행 셔틀을 타는 투숙객들이 비와 싸우고 있다. 센 바람을 업은 비가 원을 그리며 온 구석을 강타한다. 우산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다.


식당으로 들어서자 딴 세상처럼 평화로웠다. 센스 있는 미역국이 비 오는 날 선선해진 몸을 따뜻하게 했다. 아침식사도 좋다.


깨끗한 호텔에서 맛있는 밥을 먹고 더위를 잊은 채 하룻밤을 보냈다. 편안했다. 뜻밖에 맘에 드는 휴가였다.


공항에서 파리로 출정하는 올림픽 유도팀을 만났다. 멋지다. 땀 흘린 결과 이루길…


비가 계속 내린다. 보딩이 지연되었다. 다행히 바람이 잦아들었다. 대기하던 비행기들이 연이어 이륙하면서 이륙도 지연되었다. 2시간 늦게 이륙했다.


아기가족 전용좌석에 한 아기가 자기 얼굴보다 큰 소음방지용 헤드셋을 썼다. 귀여워서 절로 웃음이 난다. 백일 열흘이란다. 싫어했는지 헤드셋 대신 꽃무늬 모자를 쓴 모습이 보였다. 앙앙 울더니 잠이 들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아기도 예쁘게 키운다.


늘 그렇듯 복도좌석을 택했다. 내 옆에 창쪽으로 미국인 남자 젊은이 둘이 나란히 앉았다. 이코노미 좌석에서 옆자리에 남자가 앉는 건 반갑지 않다. 어깨가 넓어 운신의 폭이 확 준다.


그들도 조심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귀찮게 하지 않으려 꼭 필요한 것만 하면서 조용히 있다. 화장실도 안 간다. 이럴 때는 간헐적으로 일어나 일부러 자리를 떠나 있곤 한다. 그 사이 화장실을 이용하라고.  


만석인 중에 바로 뒷자리 한열 세 좌석이 통째로 비어 있었다. 승무원에게 자리를 옮겨도 되겠냐고 묻는다. 곤란하다는 표정이다. 아기부모가 잠시 쉬어갈 수 있게 일부러 비워둔 자리란다. 비행 여섯 시간째인데 사용한 흔적이 없다. 옮겨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자리를 옮기면서 옆자리 승객과 서로 Enjoy your seat으로 인사하고 헤어졌다. 그때부터 이 남자들이 화장실을 가고 기지개를 켠다. 개념 넘치는 젊은이들 같으니라구.


간식타임이 되었다. 샌드위치를 받은 옛 옆자리 젊은이가 승무원에게 뭐라 급히 말한다. 예상하지 못했던 승무원은 한 번에 캐치하지 못했다. 뒷자리에서 먼저 샌드위치를 받은 나는 당사자인지라 바로 알아 들었다. 자리를 이탈한 내가 샌드위치를 못 받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다시 설명하려는 젊은이에게 나도 받았다고 알려줬다 ㅋㅋㅋ. 귀여운 청년들이다.


여태 비어 있더니 아기엄마가 와서 앉는다. 미안한 맘에 말을 걸었다. 항공사 측의 배려에 감동이란 말도. 아기가 주제가 되면 할 말이 많지만 인사만 하자. 쉬러 왔으니 쉬게 두자. 엄마가 샌드위치와 컵라면 한 개를 끝내자마자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이제 5시간 남았다.

읽던 책을 마저 읽고 영화 한 편을 보면 도착할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내 모든 힘줄이 항변할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