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생생해서 평생 잊은 적이 없어.
51분50초짜리라 그리 오래 걸릴 분량은 아니다. 오십분 내내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도 아니고 중간중간 인터뷰를 이끌어가는 교수님의 목소리가 나오는데, 교수님이 하는 말은 매번 비슷하기 때문에 한번 듣고 바로 적을 수 있다.
타이핑을 할때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경우는 인터뷰 대상자들의 발음이 어눌하거나, 알아듣기 힘든 사투리를 많이 사용할 때다.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면 영상을 뒤로 돌려 다시 듣고 적어야한다.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는 사투리나 어휘를 구사하면 들리는데로 받아적는 걸 원칙으로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들리는데로 받아적으면 안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아는 단어를 말했지만, 발음이 어눌해서 다른 단어로 들리는 경우가 그렇다. 이야기의 흐름 상 볼펜이라고 말한 것 같은데, 봉펜이라고 들린다고 그대로 적으면 안된다는 뜻이다. 이런 경우 앞뒤 문맥을 고려해서 사용한 단어를 캐치해야 한다.
영상이 시작되자 카메라 위치를 잡고있는지 화면이 흔들렸다. 카메라 앵글 구도를 맞추고 있는 듯 했다.
안정적으로 구도가 잡힌 앵글 안에는 재윤할아버지 댁으로 보이는 낡은 집 마당이 보였다. 화면에는 낡은 회색 플라스틱처마가 빛에 바래서 허옇게 된 나무의자 위로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정하는 낡은 의자가 부서지진 않을까 생각했다.
곧 영상에는 삐쩍 마른 할아버지가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의자에 앉았다. 카메라 쪽을 바라보는 할아버지는 아마도 교수님을 보고있는 것일테다.
정하의 눈에는 영상 속 할아버지가 어딘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이분이 이재윤씨겠네.’
카메라가 어색한지 딱딱하게 앉아있는 이재윤 할아버지에게 문교수가 나긋하고 정중하게 먼저 말을 꺼냈다.
“할아버지, 제가 다 기억할 수가 없어서 녹화를 할게요. 이 자료는 연구하는데만 쓰일 거니까 걱정하지 마시구요. 그러면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재윤 할아버지는 너무 말라서 볼과 눈밑이 움푹 페인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틀니를 끼다가 지금은 잠시 뺐는지 입도 안쪽으로 말려들어가 말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정말 말하기가 어려운건지 노인은 교수님 쪽을 보며 말로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인터뷰는 보통 간단한 신상정보에 대해 질문하며 시작한다.
이재윤 할아버지는 1935년생으로 여수에서 지내다가 신안군으로 오셨다고 한다. 여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는 형님과 부모님이 다 계셨지만 어쩌다보니 고아가 되고 집도 없어졌다고..
산전수전 겪었을 인생을 저리 담담하게 말한마디로 요약하는 걸 보며 정하의 머리 속에도 물음표가 떠올랐다. ‘어쩌다가 고아가 됐고, 식구도 집도 다 없어졌다고?’
어느 날 가족도 동네도 다 사라져서 돌고돌아서 지내게 된 곳이 신안군 압해 섬에 있는 어느 고아원이었다. 가족끼리 서로 가까웠던 동네 어르신이 재윤 할아버지를 압해도까지 데려다주셨다고 한다.
몇초간 문교수는 다음 질문을 하지 않았다. 생략된 이야기가 많은 이 할아버지의 인생사를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할지 고민하고 있는 듯 했다.
생략된 이야기가 많다보니 정하도 문득 궁금해졌다. 식구들이랑 마을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없어진걸까?
인터뷰를 진행하던 문교수도 정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어쩌다가 마을이 그렇게 된거냐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입을 떼려다가 멈췄다. 허공에 시선을 두고 가만히 있는게 무언가 생각중인듯 했다. 정적이 길어지자 인터뷰 흐름을 유지하려는 문교수가 말을 덧붙였다.
“할아버지, 기억이 안나는 건 말 안하셔도 괜찮아요.”
재윤 할아버지는 시선을 허공에서 문교수쪽으로 옮겼다.
“이제는 말해도 되겠지.”
영상 속 재윤 할아버지는 무언가를 상상하는 것처럼 허공에 초점을 둔채로 멍한 표정으로 말을 시작했다. 시선은 분명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했다.
“말할라고 보니까 그게 꿈이었는지도 모르겠네. 말도 안되는 일이긴 하지. 그런데 너무 생생해서 평생 잊은 적이 없어.”
2012.12.3.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읍. 이재윤 / 꿈일지도 모를 그 이야기
열다섯 살 때 꿨던 꿈인디, 아니다 꿈이 아니여. 아침에 일어났는디 내가 바닥에 누워있는게 보였어. 거울을 본 게 아니야. 나는 벌떡 일어섰는데 누워있는 내가 또 있더라고.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온 거야.
무섭기도 한데 신기하기도 했지. 이게 도대체 뭔일이다냐 하면서 멀뚱멀뚱 서있는데, 밖에서 형님이 빨리 일어나서 밥먹으라고 소리를 지르더라고.
우리 형님은 나 보다 세 살 많았는데 키는 훨씬 컸어. 어렸을적에는 형님이 그렇게 무서웠지. 버럭버럭 밥 먹으라고 소리를 지르니까, 얼른 나가야하는데 나가야하는데 하면서 발만 동동굴렀어. 혼이 몸에서 나와버려서 일어날 수가 있어야지. 그러다가 형님이 방까지 들어왔어.
재윤아 하고 소리를 치는데도 내가 누워있으니까 넌 밥먹지마 하더니 나가버렸어.
나 혼자 두고 나가버리니까 무서워가지고 형님을 따라다니면서 계속 불렀어. 나 여기 있다고.
아부지랑 어무니, 형님이 나 빼고 밥 먹는 걸 옆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러다 시간이 좀 지나니까 무섭기보다는 신기하데. 정말로 내가 안 보이나 하고..
그래서 옆집에도 가서 뭐하고있는가 구경도 하고 마을을 돌아댕기면서 하루종일 혼자 놀았어.
그때 아부지랑 형님은 겨울에는 농사일이 없어서 고기잡이 일을 했어. 형님이 뱃일갔다가 돌아왔을 때 내가 항상 집에 있어야한다고 했는데, 없으면 그렇게 화를 냈어. 어무니 밥 차리는 거 안 도와주고 놀러 댕겼냐고. 근데 이제 내 몸이 집에 누워있응게 혼 날일이 없어서 신이 났지. 친구들 노는데 옆에서 쫓아다니면서 하루종일 놀았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놀다가 집에 와서 잤는데 다음날이 됐는데도 혼이 몸 속으로 안 들어갔더라고. 옳다구나 오늘도 놀아야겠다하고 둘째날에는 아부지랑 형님 배타러 가는 걸 따라갔어.
원래 같았으면 따라간다고 졸라도 죽어도 안된다고 했을거야. 전에 고기잡는데 따라간다고 고집피웠다가 형님한테 두들겨 맞은적이 있거든. 더 크면 물에 같이 나가고 지금은 어무니 지키고 있으라고 했지.
아부지랑 형님 따라 배에 올라타서 물고기도 잡고 재밌을 줄 알았는데 그런 건 하나도 없었어. 아부지랑 형님은 하루종일 말 한마디를 안하더라고. 거기서 선장인가 뭔가하는 사람이 시킨 일하고 그물 잡아 댕기고.
파도가 쎄서 형님은 배가 흔들릴 때마다 계속 자빠졌어. 처음에는 큭큭대고 웃었는데 형님만 하루종일 자빠지고 있으니까 속이 상했어. 아부지가 좀 도와주지 생각하고 아부지 쪽을 보면 그물을 잡아댕기느라 이러지도 못하고 자빠진 형님을 보고만 있었지.
아부지랑 형님이랑 아침부터 고기 다 잡고 집에 올 때까지 한마디를 안하는거야. 그리고 집에 오자마자 형님이 집에 와서 어무니한테 처음 꺼낸 말이 재윤이 왔어요? 하는거야. 하루 종일 배에서 자빠지다가 집에 오자마자 나를 먼저 찾으니까 덜컥 눈물이 나더라고.
어무니가 방에 가보라고 해서 형님이 방문을 열었는데, 아직도 내가 자고 있는 걸 보고는 깜짝 놀라서 아부지랑 어무니를 불러왔어. 하루종일 잠만 자니까 식구들은 내가 어디가 아픈가보다 한 거지.
어무니랑 아부지는 놀라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데, 형님이 송씨 아저씨 데리고 온다면서 뛰쳐나갔어. 송씨 아저씨가 그나마 마을에서 약 지어주는 사람이었거든.
나는 어리니까 이게 큰일인줄 모르고 하루종일 놀았다가 마음이 철렁한거지. 놀라서 그때부터 울면서 나 여기 있다고 어무니를 불렀어, 아무도 못들었지만.
집 밖에 천둥치는 소리가 났어. 나가보니까 군인들이 집집 마다 돌아다니면서 하늘에 총을 쏴대고 있었어. 이게 무슨일인지도 모르고 군인이 오더니 아부지랑 어무니한테 저기 학교 운동장으로 다 모이라고 총을 겨눴어.
아부지가 자고 있는 내 위로 두꺼운 이불을 덮어서 가리고 학교 운동장으로 끌려갔어. 나도 울면서 따라갔는데 그제야 뛰쳐나간 형님이 생각난거야. 군인들이 총쏘면서 돌아다니는데 언제 죽어도 모르겠다 싶었거든.
학교 운동장에 가니까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와있더라고. 군인들이 운동장 가운데 선을 긋고 사람들이 양쪽으로 나뉘어서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어. 갑자기 어머니가 엉엉 울면서 어딘가로 가길래 쫓아가봤더니, 거기에 형님이 벌거벗겨져서 무릎을 꿇고 묶여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