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거나 다급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데가 있다.
개와 산다는 건 무엇일까.
남들이 보면 별 거 아닐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
세상이 온통 개와 함께 한 것과 아닌 것으로 나뉘는 동안에도
누군가 ‘개와 산다는 건 어때?‘ 하고 물으면 나는 어쩐지 대답을 흐리게 된다.
여러 생각과 여러 감정들이 뒤엉켜 알아볼 수 없는 ‘무언가’를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음, 그건 말이지… 되돌릴 수 없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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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마찬가지로 개 역시나 저마다 다른 성격과 다른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
생김새가 비슷하다고, 즉 종이 같다고 다 같은 성격을 타고났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들은 전부 나의 사랑스러운 개, 꼼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음을 밝혀둔다.)
꼼을 처음 데려온 날부터 말하자면,
나는 내게 개가 생겼다는 것이 믿기지 않은 채로 밤을 맞이해야 했다.
당연히 잠은 저 멀리 도망가버린 상태였다.
낯선 곳에서 잠을 청해야 하는 꼼이 걱정되기도 했고
솔직한 마음으로는 밤새 이 작은 생명체가 죽음을 맞이할까 두려웠다.
어떤 일이 벌어지는 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단잠에 빠져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짓눌렀다.
다행히 빠르게 적응을 끝낸 꼼은 이미 온 집을 자기 구역으로 여겼다.
어떻게 저렇게 자지 싶을 정도로 자세를 바꿔가며 꿀잠을 자는 동안
웬 유난이고 주책인 인간 하나가 보초를 서겠다고 나선 꼴임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리고 꼼은 나의 유난을 아주 잘 이용할 줄 아는 영리한 개로 자라났다.
본 사건은 꼼이 집에 온 지 3개월 만에 생긴 일이다.
늘 같은 시간, 같은 양의 밥을 먹는 게 지겨웠던 건지 꼼의 단식 투쟁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하루이틀 굶는다고 해서 건강에 큰 이상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때의 심경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이 사건을 신속히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에 동네 동물병원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기호성이 좋다는 사료는 몽땅 사서 바쳤지만 전부 실패로 돌아갔다.
마지막 희망을 안고 찾아간 동물병원에선 이 모든 과정을 듣더니 탄식을 하며 습식 캔을 권해주셨다.
당시엔 왜 그런 반응을 보이셨는지 알지 못했지만 집에 돌아와 캔을 열자마자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 반려인일지라도 입에 침이 고이는 햄 냄새를 맡은 순간 알아차린 것이다.
이건 반칙이라는 것을.
괜히 병원에서 ”근데 이거 한 번 맛보면 다시는 건사료 안 먹을지도 몰라요.“라 한 게 아니었다.
그 파급력은 기력 없이 누워있던 꼼이 어느새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점프를 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 이 꾀쟁이에게 잘못 넘어갔다간 큰일 나겠다.’
본능적인 예감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그릇을 뚫을 기세로 핥는 녀석을 보면서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전투력이 차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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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한고비를 넘겼으니 다시 이 사건을 해결해 보자.
다짐의 다짐을 거듭하면서 꼼 관찰모드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 그릇에 가득 담긴 사료는 냄새만 맡고 돌아서는 반면
주변에 떨어져 있는 사료 한 알은 입에 넣고 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한 알씩 집어 건네보았다.
먹지 않았다.
두 알씩 건네보았다.
먹지 않았다.
세 알씩 건네보았다.
도대체 왜 이러냐는 핀잔 어린 눈길을 쏘았다.
아! 그럼 바닥에 떨어진 사료만 먹는 건가?
한 알을 떨어트려보았다.
관심을 가진다.
다시 한 알을 떨어트렸다.
가까이 다가와 냄새를 맡는다.
다시 한 알을 떨어트렸다.
도대체 왜 이러냐는 핀잔 어린 눈길을 쏘았다.
습식 캔에 손을 뻗고 싶은 마음을 누르면서 온갖 실험들을 이어가다가
혹시 사료알이 너무 큰가 싶어 부셔서 줘보니 그제야 간 보듯 할짝할짝 먹기 시작했다.
그 후로 모든 사료는 밥그릇으로 가기 전 절구에 담겨 잘게 다져지고서야 꼼의 입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밥시간이 될 때마다 절구질을 하면서
이럴 일인가..
정말 이래야 하는 일인가..
회의가 들 때쯤 무심코 부시지 않은 사료 한 알을 꼼에게 건네보았더니
꼼은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받아먹고선 우아하게 돌아섰다.
휘날리는 금빛 털과 도도한 발걸음은 마치 ‘너는 왜 쓸데없이 밥을 부수고 앉아있느냐’고 말하는 듯했다.
이로써 약 한 달가량 진행되었던 이름하야 <꼼 밥 절구행 사건>은 누구의 승리인지 애매한 채로 종결되었다.
되려 이제는 어떤 사료든 없어서 못 먹을 지경이라 꼼을 붙들고 도대체 그땐 왜 그런 거냐 몇 차례 따져보기도 했지만
아직까지 시원스런 답을 듣지는 못했다.
꼼만 알 일이다.
고된 사건을 해결하고 평화가 찾아왔다.
면 얼마나 좋을까.
숨 돌릴 틈도 없이 나는 또 다른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위기에 빠지고 만다.
개와 살기 전에는 개와 산책한다는 게 이토록 험난한 일인지 알지 못했다.
얼마나 많은 장애물들이 개 앞에 놓이는지 그리고 이제는 지나왔겠거니 싶었던 것들이
얼마나 지겹도록 탈바꿈을 하고선 발목을 붙드는지 말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누군가는 길을 걸으면서 치킨을 뜯는다.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고 물으신다면 길에 나가 바닥을 보며 걸어보시라 권해보고 싶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콜팝을 먹던 기억은 있어도 뼈가 있는 치킨을, 그것도 부위별로 뜯어가면서
길거리에 잔해들을 버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나도 정말 모르면서 살아가고 싶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릴까 봐 헨젤과 그레텔을 모방한 것이라면 또 모를까.
여기서 화룡점정은 이 질문으로 완성된다.
Q. 산책 중 무심코 고개를 돌렸더니 무언가를 씹고 있는 개를 발견하였다. 당신이 보일 반응을 서술하시오.
(단, 당신이 개에게 먹을 걸 주지 않았음을 전제로 한다.)
…
…
처음엔 오싹함으로 시작한다.
‘내가 먹을 걸 주지 않았는데 너는 무얼 씹고 있는 거야..?‘
그리곤 곧바로 당황스러움과 황당함, 걱정과 분노, 혼란이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밀려들어온다.
황급히 입을 벌려 씹고 있는 것들을 손으로 빼내면서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싶지 않고- 제발 꼼이 먹어도 되는 것과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영리한 개이기를 바랐다.
여기서 다행인 건 꼼이 매우 영리하다는 것을 몇 번의 사건을 겪으면서 알게 되었다는 것이고
불행인 건 아직도 간헐적으로 사건이 이어지고 있단 것이다.
나는 이 사건을 <뭔데 또 입에 넣어 사건>으로 부르기로 했다.
/
길에서 치킨을 먹던 감자탕을 먹던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그렇다. 누군가는 길에서 감자탕을 먹는다.)
그렇지만 그걸 내가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제 위험 쓰레기 감지 레이더 로봇이 되어 ‘감지-움직임-처리’ 과정을 아무런 감정 없이 해결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너무도 악덕한 고의(쓰레기의 대부분이 고의겠지만)가 느껴지는 쓰레기를 마주하면
그걸 버린 사람에게로 찾아가 정말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건지 묻고 싶다.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수치를 길에 두고서 자리를 떠나는지 말이다.
개와 산책하면서 더욱 당황스러웠던 건 길에 떨어진 담배꽁초만큼이나 빈번하게 개들의 배변과 마주한다는 사실이다.
가족이 된 개의 배변을 길에 두고 가는 행위는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다른 개들의 안위도 신경 써야 나의 개도 보호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개와 산책한다는 이유만으로 눈초리나 손가락질을 받아본 적이 있다면 내 일이 아니라는 듯 현장을 떠날 수는 없을 텐데 말이다.
물론 얼른 개와 산책하고 싶은 마음에 후다닥 뛰어나오느라 주머니 속에 배변을 치울 휴지도, 다른 어떠한 것도 없었을지 모른다.
나 역시 배변봉투를 깜빡하고 챙기지 않은 적이 있다.
당연히 주머니에 있을 거라 생각하고 당당히 집을 나섰다가 -이미 꼼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는데- 온몸을 뒤져보아도
손에 잡히는 거라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립밤 따위던 그날의 소름이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외투를 사방으로 뒤지고 있는데 누군가 나타나 내 손에 봉투를 쥐어주고선 눈부시게 떠나셨다.
(효과음이 있다면 그분께 샤랄라-를 넣고 싶다. 꼭.)
또 어떤 날엔 누군가의 당황스러움을 목격한 적도 있다.
드디어 내게도 은혜를 갚을 기회가 찾아왔다는 기쁨을 애써 숨기면서 별일 아니라는 듯 주머니에 있던 배변봉투를
슬쩍 건네드리고 돌아서는데 건네받는 사람의 눈도 못지않게 반짝거린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 요즘엔 천변길이나 공원 등 산책로에 반려동물 배변봉투함이 설치되어 있으니 자주 다니는 산책코스에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 미리 파악해 두는 것도 매우 유용하다.
어떤 분의 아이디어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드립니다. 절망의 순간에 한줄기의 빛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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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살다 보면 생각지 못한 반짝거림을 발견하게 된다.
내리쬐는 햇살 아래 엎드린 개의 등이 얼마나 반짝거리고 아름다운지
흥미로운 냄새를 맡은 개의 코가 얼마나 반짝거리고 용감한지
개와 사는 사람들은 모두 알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 역시 대체로 반짝거린다.
때론 잠시 스쳐 지나가는 것뿐인데도 반짝이는 눈으로 내 개를 바라봐주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그 눈빛은 두고두고 내 마음을 환하게 밝혀주곤 한다.
그리고 때론 한순간에 어둠을 마주하게 하는 사람을 만날 때도 있다.
개가 개라서 싫은 사람.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개를 싫어함을 티 내야 하는 사람. 심지어는 자신이 개를 싫어함을 나에게 알려주려 말을 거는 사람. 더 최악인 건 자신이 개를 싫어함을 개에게 알려주고 싶어 위협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면 어둠이 내게로 옮겨 올까 봐,
내게로 옮겨온 어둠이 내 개에게까지 닿을까 봐 서둘러 자리를 떠난다.
단지 길을 걷고 있을 뿐이었다.
길을 나섰다는 이유만으로 내 개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귀여운 강아지’였다가 ‘개xx’가 되기도 한다.
처음엔 이 간극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더 당황스러운 점은 이러한 감정표현이 너무도 쉽게 개에게 행해진다는 것이었다.
정말로 너무 쉽게. 아무런 망설임이 없이.
길을 나섰다는 이유만으로, 아니 개라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개와 같이 산다는 건 사람들이 개를 어떻게 대하는지 알게 됨을 의미한다.
개를 대하는 방식이 어떠한지 살펴보면 아주 쉽게, 하지만 무엇보다 정확하게 그 사람을 파악할 수 있다.
개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 자체를 넘어서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는지는 내게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그건 무엇으로도 되돌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