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팡이는 걷기 힘든 이에게 자신을 내어주어 다리가 되어 줍니다.
때때로 세상을 사는 지친 이들에게 거친 세상을 지탱하는 버팀목 역할을 하고 사랑과 배려를 품는 존재가 됩니다.
이야기 하나.
심심산골 깊은 산속 암자에는 오직 사람들의 깊은 시름을 덜어주고, 마음속에 일렁이는 촛불처럼 간절한 소원을 이뤄주는 석불이 있어요.
척박하고 험준한 곳으로 향하는 여정이 힘들면 힘들수록 사람들이 올리는 기도가 더 절절하게 신묘한 세계로 다다를 수 있다는 믿음에서 일까요! 아니 인간이 닿을 수 없는 한계 이상의 힘을 끌어 주기도 하고 희망의 손을 잡아 주기도 한다는 걸 확신해서겠죠!
오직 이것밖에 기대고 매달려 볼 게 없기에 엎드려 흘리는 처절한 눈물 방울이 실린 간절한 기원이 촛농을 타고 쌓여 탑을 이룰 때쯤 소원은 이루어졌나 봅니다.
외할머니는 삼각산 도선사에 주로 다니셨지만 어느 해 여름에는 도봉산 천축사라는 사찰에도 다니셨어요. 도봉산 거의 정상에 있는 깊고 험한 사찰이었죠.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에도 산속 절에는 아직 도로나 전기가 닿지 않을 정도로 문명에서 멀고 험했어요.
천축사는 척박한 위치만큼 가난한 사찰이었고요.
소수의 신도들이 이고 지고 가져간 쌀이나 의복으로 스님들이 수행을 하시고 생활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거든요.
군불을 지핀 방에는 쌀밥을 아랫목에 펼쳐서 말렸지요. 부처님에게 공양미로 올리거나 신도들에게 대접하고 남은 밥을 펼쳐서 말렸다가 스님들이 평소에 쪄서 끼니로 드셨어요.
부처님 앞에 켜는 초도 쓰던 몽당초였어요.
본 사찰에서 쓰던 초를 얻어와서 켜야 했어요. 암자의 부처님에게 올리는 초는 닳아버리고 초라해도 기도하는 마음은 다 같아 보이셨을 겁니다.
도봉산 등산로에 본격적으로 오름이 시작되는 지점 모퉁이에 작은 매점이 있었어요.
좁은 산길은 외길이라 누구나 비껴가지 못하고 그 앞을 지나가게 되지요.
거친 산행길에 모퉁이 매점 앞에는 그루터기가 있기에 등산객들이 잠시 다리를 쉬기도 하는 휴게소지요.
사이다나 과자, 사탕, 빵 등 간단한 주전부리를 파는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매점 주인은 자신이 손수 나무를 깎아 만들어 놓은 지팡이를 들고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하나씩 쥐어 주었어요.
마치 언제든 준비해 놓고 기다렸다는 듯이요. 산을 오르고, 절에 가고 그곳을 지난다는 이유로 누구에게나 흔쾌히 지팡이를 들려 보내주었어요.
손수 만든 지팡이는 도대체 몇 개나 되는지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숫자를 마치 알고 있기나 한 듯 산신령 같은 마음이 담겨 있었어요. 꺼내도 계속 나오는 화수분처럼 모자란 적이 없었지요.
누구든 달라고 하기 전에 기꺼이 나누어 주었어요. 어른들은 물론이고 저 같은 아이들까지 말이죠.
지팡이의 위력은 대단했어요.
지금부터 산행이 더 이상 힘이 들지 않게, 천근만근 무겁던 다리 무게를 줄여 주고, 굽어지는 허리를 펴주고, 든든한 또 하나의 내 다리가 되어 주었거든요.
어느 정도로 대단했는지 아시나요!
누가 내 옆구리에 날개를 달아주어 산 위까지 올려다 준다든가, 마치 케이블카를 타는 기분이었거든요.
무겁던 몸과 지친 마음에 마법이 실린 고마운 지팡이였지요.
나중에 하산할 때 고마움에 넘친 인사와 더불어
지팡이와 맞바꾼 사이다 한 병이
아깝다고 감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죠.
지팡이를 건넬 때나 거두어들일 때나
주인장은 한결같이 친절하고 상냥했어요.
설사 장사 속이든지 선의의 의도든지
그의 배려심 깊은 마음이 지팡이에 담겨 있었다고 믿어졌어요.
설사 사이다를 마셔야 할 의무감이나 강요 따위가 없다 해도 사람의 정이 먼저였고 뭘 따지고 말 상황도 아니었죠,
옛날에도 높은 산 간이매점 사이다 값은 그곳까지 올려진 노고의 값이 가격에 더해졌을 겁니다.
암묵적으로 지팡이와 사이다는 등가교환법칙으로 거래하기엔 어느 한쪽만이 공정한 거래였을지 모르지만 다들 그러려니 하며 아무 말 없이 가격을 치렀죠. 주인장의 지팡이가 더할 수없이 가치로웠으니까요.
세월이 흘러 그곳에 그 매점이 아직도 있을지 모르지만 도봉산 근처를 지나게 되면 그 매점이 궁금해요. 수많았던 지팡이는 이젠 썩어서 자취도 없어졌어도 또 다른 새로운 것들이 지팡이 역할을 대신하고 있을 거 같아요.
이야기 둘.
친정 엄마가 말년에 몇 해 동안 앓던 알츠하이머로 자주 넘어지셨어요. 사위가 보조 기구로 쓰시라고 남대문에 가서 할아버지들이 짚으시는 튼튼한 지팡이 두 개를 사다 드렸어요. 이미 수없이 넘어지셔서 응급실 문턱을 넘나들어 다들 놀란 가슴도 잦아들었고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만 남아 있음에도 엄마는 지독히 지팡이를 거부하셨어요.
이마나 턱이 깨지고 찢어져 꿔매고 손가락 인대도 끊어지더니, 코로나 시기에 결국 고관절 수술까지 하게 되셨어요.
치매나 알츠하이머는 자신이 쉽게 넘어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점점 더 깊은 망각 속으로 가는 무서운 병이지요.
처음부터 심하지는 않았어요.
지팡이는 안전을 위해 사람이 기댈 수 있는 기본적인 도구라 짚을까 생각을 하셨겠죠.
누구나 지팡이의 소중함을 아니까요.
의사의 권고에도 엄마는 결국 마음을 바꾸지 않으셨어요.
엄마는 계속 고집을 피우셨어요.
노인으로 보이는 게 싫으시대요.
시장에 가실 때도 곱게 화장을 하시고
언제나 보조 가발을 빗어 머리에 쓰시고, 옷도 멋지게 단장하시고 입으시는 분이셨어요. 사실 누가 봐도 연세보다 10여 년 더 젊어 보이셨어요.
늘 그렇게 곱다는 소리와 평가를 들으면서 살아오면 어쩌면 안전보다 여자로서의 고움이란 가치가 뇌에 각인되었나 봅니다. 마치 본능처럼요.
사실 그런 차림새에 지팡이는 어울리지 않지요.
남을 위해서가 차린 치장보다 아들, 딸의 마음을
헤아려주셨으면 했는데 결국, 단 한차례도 지팡이를 손대지 않으셨어요.
돌아가신 후 베란다 한구석에는 두 개의 지팡이가
엄마 대신 남았습니다.
이제는 그저 그걸 보며 눈물이 목구멍까지 차올라오고 저린 마음을 구겨 넣으며 못된 병마 탓을 할 뿐입니다.
지팡이에 대한 이야기가 문득 떠올라
오랜 일로 잊힐까 봐 적어보았어요.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지팡이,
현재는 등산 스틱으로 그 대용품이 나와 있지요.
지팡이를 쓰던 시절이 그리 오래지 않았는데 지금은 먼먼 옛 시절 사람들의 마음이 담긴 이야기로 기억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