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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이야기

부족한 어제도 돌아보면 추억으로 남더라

by 페이지 성희

"혼식을 합시다."

길에 가면 벽보에 혼식을 장려하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70년대 모든 게 부족하던 시대! 쌀도 부족해서 다들 잡곡을 섞어 먹으며 밥을 지었다.


국가에서 쌀밥에 잡곡을 넣어 먹으라고 장려운동을 펼쳤다.

학교에서는 포스터나 표어 공모 대회를 했고,

매주 수요일이 되면 학생들이 싸 온 도시락을 보고 혼식 검사를 했다.


총무부장이던 나는 점심시간에 친구들의 도시락을 보며

이름 옆에 o나 x를 적으며 교실을 돌아다녔다.

검사가 시작되면 쌀밥을 싸 온 애들은 부산하게 친구의 보리밥을 자기 도시락에 얹거나 심어 검사를 피했다.

그러나 몇몇은 그러던가

말던가 어쩌라고 하는 낯빛으로

당당하게 쌀밥을 보여주었다.

그 당시 북한 김일성도 남한에 무서워하는 거 하나 때문에 쳐들어 올지 말지 망설였다는데

그게 우리 중2 아이들 때문이란 소문이 있었다. 예전에도 중 2 청소년은 만만치 않았다.


어쩌랴! 겁 없는 나도 이런 검사가 싫었다.

쌀밥이 들에게 세모를 적는다.

마음 여리고 고지식한 나도 차마 x는 못하겠더라!

세모의 뜻은 매일 함께 어울리는 친구에게 차마 x를 줄 수 없어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고

담임이 뭐라 하면 쌀밥 속에 보리가

한 두 개더라 하면 그만이었다. 배짱이라면 배짱이었을까!

이런 검사가 뭐라고 그 맛있는 도시락을 친구들과 나눠 먹기 전에

밥맛부터 떨어졌던 시절의 이야기다.


나도 사실 혼식이 싫었다.

뽀얀 쌀밥이 좋았다.

쌀밥은 생일날이 되어야만 먹었다.

자주 먹지 못해서인지

어쩌다 먹으면 너무나 달았다.

어떤 쌀로 지어도 흰쌀밥은 다 맛났다.

씹을수록 어찌 그리 단맛이 나고

보드라운지 모르겠다.


그런 나도 이젠 입맛이 바뀌어

보리밥은 물론이고, 아예 깡보리밥도 좋다.

여름에 보리밥에 열무김치 송송 썰어

들기름 휘리릭 돌려 비벼 먹는

열무 비빔밥은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도는 별미밥이다.


우리 할머니는 여름이면 지치지 말라고 보리를 쪄서 말리고 가루를 내어 미숫가루를 만들어서

손주들에게 먹이셨다.

커다란 사발그릇에 미숫가루를 숟가락으로 하나 하고 둘 넣고, 하얀 설탕도 그 만큼 넣고 휘휘 저어 마시던 구수하고 달콤한 보리 미숫가루가 마음속 너머부터 시원하고 든든했다.

이제는 여름마다 그립고 그리운 할머니표 미숫가루 로 남아있다.



초여름에 청보리밭에 가보았다.

여름날 싱그런 바람에 휘날리는

연두색 청보리밭은

낭만이 넘치고 아름다웠다.


영화 "아저씨"에 나온 원빈이란 배우가

정선 청보리밭에서

인상적인 결혼식을 했다.


"겉보리 서말이면 처가살이 면한다'란 말도 있다.

서민들의 기초생활의 기준이 보리 서 말이었다는 의미였을까!


전래놀이 가운데

"쌀보리 놀이"도 있다.

아주 어린애부터 노인들도 함께 할 수 있고 두 손만 가지고 어디서나 노는 놀이다.

손의 악력 힘도 키우고

민첩성을 키우는 데 최고다.


우리 집 강아지 이름이 보리다.

보리는 이름처럼 순하고, 사람 좋아하는

잘 짖지 않는 순둥이다.


먹는 음식으로 이름을 짓고,

놀이 이름에 붙이는 정다운 곡식이 있을까?

춘궁기를 견디며 기다림 끝에 수확하는

귀한 곡식이 보리다.

사람들 삶에 스며들어 있는 생명 같은 보리,

보리는 한국인에게 특별하고 아름답고 고마운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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