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같은 여고시절
보통의 여학생들은 중3이 되면 바람이 생긴다.
동네 학교가 아닌 꽃이름 같고 고고한 느낌의 역사 깊은 여고에 가고 싶어 한다.
사실 역사와 전통의 학교는 한낱 이름뿐이 되었는데도 말이다.
11월의 추운 한겨울 밤.
식구들이 모두 잠든 깊은 밤.
혼자 살금살금 마루에 나와 발을 동동 떨며 차가운 마룻바닥에 엎드려 할머니처럼 달님께 기도하며 빌었다.
며칠 후 학교를 발표했다.
마음속에 학교가 아니다.
지금은 북촌마을이라 불리는 곳의 ㄷ여고에 배정되었다. 생소한 교명이다.
처음으로 바람이 생겼고 간절히 기도하면 이루어진다 들었는데 세상 일이란 게 바라고, 기도해도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다.
차라리 평준화 전이었더라면 시험이라도 쳐보고 붙는지 말든지 했을 텐데 오직 운에 맡긴다는 게 마냥 기대에 찰 일은 아니었다.
소위 과거에 명문여고이던 학교들은 시내의 사대문 안 중심가에 자리했다.
공동학군을 지원해 넣어야 갈 수 있었기에 부푼 기대감으로 지원서를 넣었지만 난 뺑뺑이 운이 부족했나 보다.
평준화가 된 지 여러 해가 지난 학교는 옛 시절에 그저 명성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각 학교만의 교풍과 독특한 교복이 대다수의 예비 여고생들의 마음에는 나만의 개성과 학교 이미지로서 선망의 대상이었던 거다.
나의 교복은 모든 여고 가운데 개성이 뚜렷하다 못해 도드라졌다. 입으면 들어갈 데가 들어가고 나올 데가 선명할 거 같았다(?) 상의는 타이트하고 하의인 치마는 항아리형이다
요즘식으로 비유하면 "엽기적인 그녀"의 그녀를 닮은 애들이 입어야 교복빨이 났다.
대신 교복 카라 노동(?)에서 해방이다. 중학교 시절 내내 빨아서 다려서 교복 카라에 꿰매던 카라 세탁에서 벗어나 이제는 교복 안에 블라우스를 입고 다니게 되었다.
또 머리를 길러 양갈래로 땋고 다니라 한다.
당시에 여자애들은 자기 일은 스스로 알아서 했다. 바쁘신 엄마대신 양손을 뒤로 돌려 혼자서도 슥슥 신속하게 머리 땋는 연습을 했다.
머리 길이는 1학년때에 잠시 짧아도 되지만 땋지 않고 자르고 다니면, 마치 남학생이 머리를 기른다거나 삭발을 하는 거처럼 사회에 불만 있어! 하고 선생님들이 세모눈을 하며 반항하냐며 암묵적인 표시로 여겨 찍혔다.
단지 고3이 되면 머리 땋을 시간에 책 한쪽 더 보느라 그러려니 하고 끈으로 한번 묶고만 다녀도 내버려 두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시절에도 여고생 나이가 되면 아가씨들이라
고 2 여름방학이 지나면 여성미가 드러나 보였다. 우리 학교 교복이야말로 여성미를 뽐내도 좋을 자랑스러운(?) 교복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들 티 안 나게 살짝 고쳐 입었다.
아이들 중에 몇몇은 교복을 더 줄여 입는 초밀착형(?) 교복을 입고 다니기도 했다.
과하게 고쳐서 입는 애들은 아웃사이더였고 우리보다 선생님들의 레이다망에 걸려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입학하니 교문 앞에 중학교로 이어지는 구름다리가 있었다. 구름다리에는 전설이 내려온다. 구름다리로 지나다니는 학교는 경기고 남학생들이 많았다. 우리 선배들이 평소에 점 찍어둔 남학생에게 잽싸게 쪽지를 건넸는데 언제, 어디서 만나자 했다가 반응이 없거나 거절당하면 그 구름다리 위에서 복수를 했단다. 다리위에서 그 남학생이 지나가길 기다려 양동이에 물을 쏟아 교복째 시원하게 샤워를 시켰다 한다. 그러나 반전이 재미있다. 비록 데이트에 거절을 당해도 신기하게 졸업 후 커플이 되어 팔짱을 끼고 명동거리를 누볐고, 말괄량이 선배들이 자신들이 찍은 이상형과 졸업 후에는 시집가서 잘 먹고 잘산다카더라다.
사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선생님들이 이 이야기에 덧붙여 하신 말씀이 우리 학교가 터가 쎄서인지 졸업생들이 생활력이 강하고 씩씩해서 다들 잘 산다고 하셨다.
"그땐 그랬다" 이야기지만 자기가 찍은 남학생한테 바람맞았다고 통쾌하게 복수하고, 결국에 커플이 되다니 웃기고 혀를 내두를만한 전설이다.
2학년 때 우리 담임 ㅂ선생은 잘생긴 훈남이라 인기가 많았다.
담임의 와이프가 우리 선배였다. 돌아 다니는 소문으로는 졸업전에 서로 연애 감정이 있었다가 졸업하자마자 결혼했는데 문제는 우리 담임의 현재 모양새다. 바짓단은 단이 꿰매지 앉은채 너덜거리며 다녔고 늘 아침을 굶었다며 투덜대셨다. 아이들은 어리고 예쁜 마누라와 사느라 부부싸움으로 내조도 못받고 산다고 낄낄대며 흉을 봤다.
학교는 종로구라 시내 중심가에 있다. 주변에 경복궁이 가까웠다.
백화점, 학원가, 대형서점과 미술관이 학교로 가는 길을 따라 있어서 등교를 하는 매일이 나들이 같았다.
대신 등교하는 아침마다 버스 타기가 고역이었다.
학교를 향해 가는 버스는 일명 "에브리바디 스쿨버스" 다. 시내에 있는 온갖 학교 앞에 멈추는 무늬만 시내버스다.
출발할 때부터 이미 만석인 데다. 어떻게 학교가 있는 황금노선만 돌아다닐 수 있는지 불가사의했다.
버스로 혜택을 보는 건 학생들이 낸 회수권(학생들이 돈대신 내는 차표)을 세는 차장이 아닌 배 두들기며 부자가 된 사장뿐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른 시간부터 차 안은 이미 학생들로 콩나물시루다. 버스에서 내리면 단추 한 두 개
떨어지는 건 예사이고 무거운 가방은 인파에 끼거나 손을 놓치면 밀려다녔다.
주인 없는 가방은 늘 제주인에게 돌아갔으며 맨몸으로 내린다 해도 걱정이 없었다.
가방 주인을 아는 듯 친절한 누군가가 번개처럼 창밖으로 던져주었다.
엄마가 정성 들여 다려 주신 교복은 구겨지고 몰골은 엉망이 되었다.
겨울이나 여름이나 타인의 체온과 체취로 고역인 학굣길이었다. 그래도 다들 그러려니 별일 아닌 듯 불평도 안 하고 묵묵히 매일 그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다.
심지어 학생들을 차 안에 들이밀던 차장언니가 한 명이라도 더 태우려고 하다가
자신은 한 발만 올린 채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가기도 했다.
그래도 신기하게 학생이 떨어졌다는 뉴스는 없었고 악착같이 매달린 차장언니도 대롱대롱
매달려 갈지언정 버스는 폭주하며 안정사정없이 달렸다.
그 시절에도 분명히 정원이란 게 있었을 텐데
바퀴가 주저앉아 펑크가 날 정도로 꾸역꾸역 태우고 또 태웠다. 학생들은 지각하지 않으려 악착같이 탔다. 학생들은 어디서나 짐짝이었다.
매일 아침 이런 차를 어린 학생들이 타고 다녀도,
부모나 어른들은 모두가 학교라도 다닐 형편이면 다행이고 감사해야 한다 했다.
고생도 삶에 보탬이 된다고 불평 한마디라도 뻥끗하면 나무랐다.
그땐 그랬다. 도시이건 시골이건 다들 바쁘고 부지런히 뛰어다녀도 간신히 먹고살았기에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고 누군가 얘기해도 귀 기울여 듣는 이도 없었다.
햇살이 눈부신 아침의 학교에 들어서면 교내 방송실에서 경음악이 교정을 울려 퍼지며 이런 곡들이 흘러나왔다.
The Queen Of Sheba(시바의 여왕), Ballade Pour Adeline(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Les Fleurs Sauvages(야생화), Isadora(맨발의 이사도라) El Bimbo, El Condor Pasa......
일제 강점기 시절이 연상하는 목조식 구관과 회색빛 신관이 음악에 휘감겨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점심시간에도 교내 스피커에서 이런 음악들이 흘러나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른들이 들을법한 곡들인데 왜 이런 음악을 어린 학생들에게 들려주었을까?
구관은 3학년과 야간 학생들이 쓰기에 낮에는 빈 건물이다. 미로 같은 구조를 했다. 신입생 때 괜한 호기심에 혼자 들어 가 구경하다가 길을 잃어버려 헤맨 일이 있었다. 어둡고 고요한 게 학교 괴담이 연상되는 곳이었다.
신관은 2, 3학년 교실이 있었다. 신관에는 계단이 없다. 평평하게 경사진 복도를 만들어 오르내리게 만들었다.
체육복은 요즘 맨투맨 티와 비슷했다. 신축성이 있어 편하고 단체로 구매하기에 값도 쌌다.
여름용과 춘추용 두 종류인데 두께만 다를뿐 재질은 같아 하복은 여름에는 입기만 해도 더웠다
체육 수업이 있는 날은 반 전체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평소에 타이트한 교복에서 탈출하려고
등교하자마자 모두 체육복으로 갈아입는다. 3학년이 되면 저절로 체육복이 온종일 실내복이 되었다.
신관에서 수업을 하는 2학년이 되니 계단 없는 건물이라 모두 걷는 게 아닌 발에 날개를 단 듯 날아다녔다.
체육 수업이 있는 날은 반 전체가 우당탕거리며 한걸음에 운동장까지 달려 내려왔다. 다 같이 손잡고 달리는 재미는 달려본 사람만 안다.
1층이 교무실이라 당연히 선생님들이 천둥 번개가 치는 줄 알았다고 놀라서 눈을 쟁반만 하게 뜨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야단을 치셨다.
우리끼리 누리는 소소한 장난에 자유를 포기하지 못했고, 선생님의 호통에 잠시 고양이 걸음으로 걷는 척하다가 더 크게 발을 구르며 달려 내려왔다. 교무실이 없었어도 걸어 내려오기에 아쉬운 "달려라 달려 길"이라 아니던가! 늘 장난치며 뛰어다녔다. 여학생이나 남학생이나 애들은 그저 애들일 따름이었다.
중학교 때에 비해 우리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다수 여학생들이 중학생 때처럼 툭하면 몽둥이로 맞는 체벌이 확연히 줄었다. 예비 숙녀니 더 이상 어린애들이 아니라고 보아서였을까.
그래도 고의로 교칙을 어겼거나 교사에게 대놓고 반항하는 애들은 여전히 몽둥이로 손바닥 엉덩이를 맞거나 복도에 나가서 팔 들고 벌을 받았다.
불시에 가방검사도 여전했다. 여고생의 가방 안에서 사복이 나오거나 하면 불려 나가 반성문을 쓰게 하고 체벌을 받았다.
1학년에 입학하면 오리엔테이션 기간에 교가와 함께 충격이었지만 군인들이나 부르는 군가를 배웠다. 가사를 익히며 불러야 했다.
교련이란 과목이 생겨 전시에 여학생들이 간호를 하기 위한 응급처치술을 배웠다. 주로 다친 상처에 두르는 붕대 감기다. 여학생도 호국정신으로 무장하라며 제식훈련을 했다. 팔과 발을 맞추어 뙤약볕이 내리쬐는 운동장을 걷고 또 걸었다.
가끔 특별활동이라고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오면 학교 인기 짱 응원대장 언니가 단상에 올라서 요즘 아이돌핏 춤을 보이며 신나게 응원 연습을 했다.
농구나 배구 같은 학교 대항 경기에 응원을 가기 위해 응원 연습도 하고, 오전 수업 후 동대문 운동장(구 서울 운동장)이나 장충 체육관으로 경기를 보러 가거나, 온갖 국제 경기에 응원단으로 동원되기로 했다.
요즘 같았으면 학생을 강제동원 하는 일을 상상할 수 없지만 이미 중학생 때부터 이루어졌다. 아이들은 수업 대신 논다고 모두 신나 했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어디선가 익힌 유행가나 팝송을 친구들에게 알려주고 풍금을 치며 입을 맞춰 노래했다.
영어 문장이나 단어보다 팝송 가사는 어쩌면 그다지 귀에 쏙쏙 박히는지 모르겠다. 평생 잊히지 않는다.
우리는 사춘기 여학생들이 누릴법한 소소한 즐거움을 스스로 찾았다.
진추하의 "One Summer Night"
찬송가로 유행가가 된 "사랑은 언제나",
존 덴버, 사이먼 &가펑클의 음악
ABBA의 아름다운 곡들이 머리에 맴돈다.
혜은이의 데뷔곡 "당신만을 사랑해"가 처음 방송되던 장면도 생생하다.
다들 모습도 목소리도 아름다워 천사인 줄 알았다고 감탄하며 팬이 되었다.
초여름의 구관 앞마당엔 고목이 된 고무나무가
여러 그루가 있어 마당에 그윽한 그늘을 내려 주었다. 이런 노래를 우리는 그 그늘아래 앉아
나뭇잎이 바람에 속살대는 소리를 들으며 불렀다. 중심가 학교만의 차분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와 노랫소리가 오래도록 생생히 남아있다.
학교 안에서 가끔 기괴한 일도 벌어졌다.
어찌 된 일인지 여름에는 복도에 먹다 버린 수박껍질이 내동댕이쳐 있었다.
복도 옆에 창과 바싹 붙은 건물이 있었다.
ㅅ학원이다. 왜 여학교와 찰싹 붙어 지어졌는지
학교가 나중에 그곳과 붙어서 불법으로 지었는지 모르지만 평소에는 고요하던 곳의 존재가 여름만 되면 발거 벗겨지듯 드러났다.
누군가 먹고 버린 수박껍질을 우리가 다니는 복도에 던져 놓는 거다. 도대체 어딘가에 뚫린 쥐구멍으로 우리를 훔쳐보았을 희번득이는 불결한 눈동자가 상상되었다.
먹고 나서 버린 껍질을 여학생들의 공간에 던져버리는 양심에 모두 "땡중 놈"이라고 들으라는 듯이 소리 내어 욕을 해댔지만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학교 측에서 항의를 했다면 다신 그런 일이 없었을 텐데.
선생님들은 입을 다무셨고, 해마다 여름이 오면 어김없이 같은 일이 반복해서 벌어졌다.
그 당시에도 애들은 요즘처럼
아침을 먹고 오지 않았다.
아침마다 용돈이 넉넉한 친구들이 안국동 로터리에 있는 빵집에서 갓 구운 식빵을 사 와서 친구들과 나누어 먹었다.
빵집 주인은 등교 시간에 맞추어
큰 식빵을 삼등분해서 한 덩어리씩
소분해 놓았는데 한 봉지에 200원이었다.
학생이 사면 10원을 깎아 주어 190원이다.
아침마다 폭신하고 고소한 빵을 나눠 먹는 재미로
고된 등교를 위로받고 사춘기의 출출한 배를 채웠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기대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