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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고 보니, 어느 봄날 볕뉘였네(2)

by 페이지 성희
현재 송현공원에서 바라 본 안국동 학교 부근 예전 건물이 그대로다

2학년이 되니 수학여행을 갔다.

여행이 드문 시절이라 방학에 외가댁에 가는 애들 빼고 모두 난생처음 기차를 타고, 타향으로 여행이란 걸 떠난다 하니 설레었다.

거의 모두가 인생 첫 여행이 수학여행이기도 했다.

더구나 교과서에 나오는 신라시대 수도로 가는 경주여행은 해리 포터의 마법처럼 신기할 뿐이다.


수학여행을 갔다 오니 한 반이어도 몰랐던 친구들을 알게 되고 서로 친하게 되었다.

한 친구와 평생 절친이 되었다.

무엇보다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김ㅎ"

여자애 이름이 아닌 중성 느낌이 나면 왠지 멋지다. 외자 이름을 갖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구관 앞에서 초여름 춘추복을 입은 모습


나는 동생이 셋이나 있는 장녀인데 친구는

부모님이 어화둥둥하는 귀한 외동딸이다.

늘 무섭고 어렵기만 한 아버지를 살갑게

"아빠"란 호칭으로 부르며 그 당시엔 드문

딸바보인 아버지와 친구처럼 다정했다.


어느 날 친구집에 놀러 갔더니 그 애 아버지가 찐 밤에 껍질을 까고 계셨다. 껍질을 까는 족족 그 애 입에 쏙쏙 넣어주는 거였다. 나도 아기새처럼 입을 벌리면 내 입에도 넣어주실까 감히 상상해 본다.


나중에 ㅎ 결혼식 때 사위 손에 딸을 넘겨주고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시던 모습이 뭉클했다. 그 당시 아버지들은 자식에게 온마음을 표현하는 게 어렵고 쑥스러웠을 텐데 남들 눈치 안 보는 아버지도 계셨다.


그 애는 언제나 해맑고 애교가 넘쳤다.

차분하고 내성적인 나와 성격이 반대였다.

그래서였을까! 서로 달라서 끌리고 닮고 싶어 붙어 다녔나 보다.


대학도 문과 여학생들이 선호하는

영문과나 교대가 아닌 작곡과를 지원했다. 피아노만 배워도 감지덕지하건만 여러 악기를 배우고, 대학교수에게 레슨을 받으러 다녔다.

엄마처럼 영어 교육과에 가서 영어 선생 하라는 말을 어기고 간신히 얻어낸 작곡과다.

누가 소띠에 쇠고집 아니랄까 봐.

그토록 다정한 아빠한테 뺨 한 대 제대로 맞고 제 뜻대로 공부하게 되었다 한다.


그 애는 별났다.

무엇보다 처음 보는 낯선 이와 거리낌 없이 말도 쉽게 건넨다. 언젠가 안암동 고대 앞을 무단횡단하다 교통경찰한테 걸렸다. 경찰이 무섭지도 않은지 태연히 웃으며 말 몇 마디에 봐줬다고 영웅담처럼 떠벌렸다. 놀랍고 신기방기한 애다.


그 시절에는 여자애들이 낯선 남자와

말을 나눈다는 게 쉬운 게 아니었다.

위험하다 배웠다. 더구나 경찰이라면 누구나 그 앞에서 주눅 들고 말 한마디는커녕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벌벌 지 싶다.


예전에도 여자 애들에게 금기사항이 많았다.

안된다, 하지 마라. 가지 마라.

모든 하라가 아니라 마라다.

세상이 위험하다는 걸 어릴 때부터 세뇌를 받으며 자랐음에도 그 앤 달라도 너무 달라 딴 세상 사는 말괄량이 삐삐 같았다.

언제나 활달하고 거침이 없었다.

어쩌면 여덟이나 되는 이모와 수많은 사촌들과 어울리다 보니 세상과 사람에 대한 처세가 쉬워지고 진입의 벽이 낮아졌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촌 오빠가 다니는 대학교에서 용감무쌍하게 여름방학 영어 특강도 들었다.

그 애의 강압(?) 어린 제안으로 얼떨결에 따라가 이름도 생소한 vocabrally 수업을 들었다.


평소에 땋았던 머리를 풀고 여대생인양 사복을 입고 시치미를 떼고 강의실에 들어갔다.

친구 따라 강남 가기보다 더 모험찬

친구 덕에 대학생 놀이를 다니

17세 인생에 꽃나발을 분 격이다.


엉뚱하고 하고픈 거 뭐든 하는

아이와 어울리다 보니

나도 성격이 활발해져 갔다.


세상에 대한 경계심도 점차 줄어갔다.

세상이 생각보다 위험한 곳도 무서운 사람만 있는 데가 아니다란 생각을 마음에 여유도 생기고 배짱도 싹트기 시작했다.


친구 따라서 음악감상실이란 데도 처음 가보았다. 토요일 수업이 일찍 끝나면

종로 1가에 있는 클래식 음악 감상실

"르네상스"에 가서 작곡 숙제를 위해 녹음을 부탁했다. 꼭 나를 데리고 갔다.

얼핏 봐도 안에 있는 손님들 주로 대학생이나 성인들이고 고등학생은 우리뿐이었다.

컴컴한 공간 속에서 입장료를 내면 나오는 음료수인 콜라잔을 들고 천천히 홀짝이며 길고 지루하며 알 수 없는 클래식이란 음악의 바다를 헤매었다.


ㅎ와 늘 붙어 다니니 신기하게 생리주기도 같았다.

뭔가 속이 느글거리고, 비릿한 느낌이 들면 둘이서 비위를 가라앉히려고 마시던 게 있다.

"삼강사워" 다. 우리는 입맛도 닮았다.

연한 오렌지 빛깔에 요구르트와 오렌지를 섞은 음료는 달지 않고 물을 섞은 듯 산뜻하고 가벼운 맛이다. 용돈이 넉넉지 않아 한 달에 한두 번 사서 마시곤 했다.

지금은 단종되었지만, 가끔 우리 세대만 아는 추억의 맛은 혀가 기억하더라.

추억은 맛으로도 남는다!


르네상스 간판
1951년~1987년

사실 나는 음악보다 미술감상을 좋아했다.

하교하며 종각역까지 이어진 길을 걸으며 종종 미술관 순례를 했다.

미술관 순례는 또 다른 친구와 함께다.

지금은 이름이 가물가물한데 주근깨가 많이 난

말없고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는 키가 자그마한 아이였다.


미대를 가고 싶어 한 친구는 그림을 좋아할 뿐 아니라, 미술대회에서 늘 상을 받을 정도로 기막히게 그림을 잘 그렸다


형제가 많은 집에 늦둥이 막내였다.

혼자서 독학을 해서라도 꿈을 이루고 싶어 했다.

그 애는 늙고 가난한 부모님의 형편을 알기에 말도 꺼내지 못하고 끙끙대며 고민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미술 선생님한테 학원을 다니지 않고 혼자 공부하며 미대에 갈 수 있냐고 물었다가

"절대 안 돼!"라는 호통의 한마디에 놀라서 충격을 받았다 했다.

내게 그 말을 전하는데 목소리가 떨렸다.


가정형편으로 힘들어하던 와중에 교사의 냉정한 말 한마디가 촉발제가 되었는지 점차 말을 잃어갔다. 학교에 와서는 아무와도 말을 나누지 않고 멍하니 수업만 받거나 조퇴를 하는 일도 잦았다.


나중에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담임 대신 그 애 집에 갔더니 그 애 방에는 벽마다 빼곡하게 중세시대 여성 초상화를 (달력 그림) 수십 장 붙여 놓았다. 너무 기괴해서 놀랐고 친구가 병이 낫지 않았구나 생각되었다.


벽에 있는 초상화속 여자들의 눈이 마치 살아 있는 듯 우리를 쏘아보는 듯했다. 나와 그애 언니가 몇 장만 붙이고 나머지는 떼자고 설득해도 친구는 안된다고 고집을 피우며 너무 아름답지 않냐고 내게 물었다.


그날 친구의 문병을 왔다고 언니가 엄마처럼 정성스럽게 밥상을 차려 주어서 불편한 마음으로 대접 아닌 대접을 받았다.


집안에는 시각 장애인 이모와 할머니, 삼촌들과 조카 등 식구들이 많았다. 대가족이 함께 모여 사는 집이었다.


먹여야 할 입과 돌보아야 머릿수가 많은데 아무리 늦둥이 막내라 해도 사실 미대는 꿈같은 이야기며 사치였을 테니 그걸 모르지 않기에 꿈과 현실 사이에서 친구가 얼마나 방황했을지 이해가 되었다.

결국 친구는 우리가 졸업할 때까지 병원을 오고 가다 복학도 못하고 학교를 자퇴하고 말았다.


평소에 말수도 고 자기 생각을 드러내지 못하던 마음 여린 소녀는 결국 꿈이라는 걸 피워 보기도 전에 져버리고 말았고, 어떤 방법이라도 선생님이라면 찾아주리라 기대하던 미술 교사한테 말 한마디 일지라도 상처까지 받고만 게 안타깝게도 마음의 병으로 깊어지고 말았다.


미술이나 음악, 예체능에 소질이 있어 그 재능을 계속 키운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장애물들을 넘어서야 꿈에 다다르는지 모른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경제적인 문제가 첫 번째 난관이기에 일찍 꿈을 포기하는 학생이 그때에는 더 많았다. 아니 아예 입도 뻥끗하지도 못하고 마음속 싹을 잘라야 다. 포기가 현명한 선택이나 결정보다 우선이 되었다.


어쩌다 인천행 전철을 타고 가는 길에 그 친구가 살던 집 역을 지나면 그 일이 떠올랐고 마음이 우울해졌다.


그 친구가 아프기 전에 함께 미술관을 다녔던 일이 서로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기를 바랄 뿐이다.


학교 근처에는 서울 미술관, 시립 미술관이 있었다.

주로 무료입장이었고, 가끔 그림 전시의 주인공인 화가도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림에서 풍기는 독특한 안료 냄새가 미술이란 세상으로 빠져 들어가는 통로 같았다.


싸늘하면서 쌉싸레한 향기가 살짝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짜릿했다. 어쩌면 나도 그 친구처럼 그림으로 살아가고 싶은 세상을 그리워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감히 화가가 되고 싶다는 건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일주일에 한 번씩 미술관 관람으로 만족했다.

미술관 탐방은 매연과 복잡한 도심 학교생활에서 위안을 주는 걸로 충분했다.


학교 근처에 있 비원


학교 뒤편에는 정독 도서관이 있다.

10분만 가면 된다. 예전 경기고 자리였다.

토요일에는 그곳에서 종종 친구들과 어울려서 공부했다. 나는 집보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게 편하고 좋았다.


평일에는 오랫동안 시험을 준비하는 일반인이나 대학생이 많아서 자리가 나지 않기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토요일 오후는 그들도

피 끓는 청춘인지라 데이트를 한다고 오후에는

퇴실을 했고 그 덕분에 빈자리가 쉽게 생겼다.


도서관은 오래된 고성처럼 아름답고

엄숙한 분위기다.

어찌 보면 도서관이 아니라 멋진 저택에

정원이 메인인 곳이다.

정원사가 따로 있나 싶을 정도로

철마다 꽃을 아름답게 심어 가꾸어 놓고

나무도 범상치 않은 자태로 다듬고 가꾸었다.

도서관이기에 놀러 온 곳이 아니니 학생들은

말도 행동도 정숙해야 했다.

심지어 슬리퍼를 신고 입장하면 쫓겨나기도 했다.

정원을 돌아다닌다는 건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다.

만약 돌아다니는 학생이 보이면 관리 아저씨가 호루라기를 불어 건물 안으로 들어가라고 쫓았다.

정원은 아쉬운 눈으로 작은 창을 통해서

보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박물관이나 궁궐같이 아름다운 장소는 공부에 방해가 된다. 이곳이 그렇다.

책에 몰두해야 하는데 자꾸만 눈길이 창밖으로 향하고 집중하는 게 쉽지 않았다.

특히 비 오는 흐린 토요일의 도서관은 프랑스 영화"라스트 콘서트"에 나오는 몽쉘미셀을 안갯속에 헤매는 몽환의 느낌이 다.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하얀 레이스

드레스를 입고 있는 기분이랄까.

고즈넉하고 차분함이 지나쳐 센치멘탈

감상에 젖게 했다.

가까이하기엔 너무나 머나먼 그곳이다

정독 도서관
우리 학교 가는 돌담길 지금도 그대로다


여고 시절 이야기를 쓰다 보니 그저 학원 다니고

학교에서 공부한 거밖에 쓸 게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많은 이야기와 우아하게 문화생활을 했나 싶다.

돌이켜 보니 시내 중심가 있는 학교에 다니며

그 시절 다른 지역 학생들보다 문화 혜택을 많이 받았던 거 같다.

특별한 오락도 여가도 누리지 못한 시절이어도

나름 추억 넘치는 학창 시절을 보냈다.


또 한 가지 부모님이 뭐든 하지 마라 , 가지 마라 했어도 허락받지 않고 갔고, 갔다 왔다고 말도 안 했다.

그렇게 음악 감상실이란데도 가고, 미술관도 가고, 대학에서 강의도 듣고 해보고 싶은 건 다해본 알고보면 아웃사이더였다.

지금 문득 생각이 드는데 어쩌면 어른들은 아시면서 모른 척하신 건 아닌가 싶다.

덕분에 추억도 한 보따리, 글감 부자인

오늘의 내가 있게 되었다.


- 글을 쓰며 자료를 찾다 보니 학교가 104년이 된 명문 여고라는 걸 새삼스레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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