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파 밭에 묻힌 세월
두 귀가 들리지 않아 늘 얼굴과 입 모양을 보시며 대화를 나누셔야 하는 어르신. 하루 종일 별말씀 없이 조용히, 침상 위주의 일상을 보내고 계신다. 올해 아흔을 바라보시는 연세, 몸은 많이 불편해 보이신다.
음식은 무엇이든 아주 잘 드시지만, 식사 시간 외에는 방 밖으로 나오시려 하지 않으신다. 그럴 때면 거실로 이동하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며, 여러 프로그램 활동에도 자연스럽게 어울리실 수 있도록 정서적인 지원을 해드린다.
기분이 좋으실 때면, 마음에 드는 선생님들을 바라보시며 귀여운 눈웃음을 보내시곤 한다. 손짓과 눈빛으로 당신 곁에 있어 주기를 바라시는 모습이 느껴진다. 아련한 눈웃음과 함께 지으시는 그 귀여운 표정은, 보는 이의 마음을 절로 따뜻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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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남편을 일찍 여의시고 네 남매를 혼자 키우느라 무척 힘드셨다는 말씀을 자주 하신다. 지나온 삶의 이야기를 풀어놓으시며,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같은 질문을 반복하신다.
“선생은 남편 있느냐, 애들 있느냐, 자녀는 몇이나 두었느냐, 몇 살이냐, 결혼은 시켰느냐….” 이런 질문 속엔 어르신이 살아오신 세월의 무게와 자식 걱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당신께서는 네 남매 모두를 대학까지 훌륭히 졸업시켰고, 지금은 다들 잘 살고 있다며 자랑스레 말씀하신다. 말끝마다 자부심이 묻어난다.
“자식들 어떻게 키우셨어요?"
“정말 너무 힘들었지…”라고 하시며, 한숨 섞인 웃음으로 이야기를 꺼내신다.
하루 종일 남의 밭에서 쪽파를 뽑고 6만 원을 받았고, 야간작업을 더 하면 10만 원까지 받을 수 있어, 종일 허리를 구부린 채 앉아 일하셨다고 하신다. 그렇게 자식들 학비를 감당하고, 생계를 책임지며 한평생을 바쳐 오셨다고 한다.
그 긴 세월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어르신의 몸을 보면 절로 짐작이 된다. 침상에서 내려오실 땐 마치 네 발 짐승처럼 움직이신다. 엉덩이는 하늘로 있고, 두 손은 바닥을 짚고, 얼굴은 앞을 바라보신다. 반쯤 구부러진 허리는 제대로 펴지 못하셔서, 두 팔과 두 다리로 땅을 짚으며 천천히 이동하신다.
귀가 들리지 않으셔서 입모양을 보며 소통하신다. 평소에는 무음으로 입만 벙긋거리시며, 눈빛과 표정으로 말씀을 전하신다. 마치 벙어리 흉내를 내듯 조용한 모습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갑자기 큰소리로 화를 내시며, 분명하게 의사를 표현하신다.
사탕 한 움큼을 손에 꼭 쥐여주시며, 무음 입모양으로 “먹어… 먹어…” 하시는 어르신의 모습에 따뜻한 사랑이 전해진다. “괜찮아요, 안 먹을게요” 손사래를 쳐도, 끝내 손에 쥐여주시며 내미는 고운 마음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다.
긴 대화를 나누는 건 어려우시지만, 다양한 경험이나 감정을 이야기하는 데 익숙하지 않으시다. 오직 생계를 책임지며 살아오신 삶, 오직 쪽파 이야기뿐이시지만, 그 안에는 깊은 자부심이 깃들어 있다.
한평생을 쪽파 밭에 묻어두고 살아오신 삶이라,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 낯설고 서툴다. 가끔 멍하니 조용히 앉아 계실 때면, 일부러 다가가 손을 잡아드리고 안아드리면 실눈으로 웃으시며 쑥스러워하시고, 멋쩍어하신다. 그 표정 안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뇌와, 묵묵히 견뎌낸 인생살이가 담겨 있다.
오로지 일과 가장의 무게를 짊어진 채 살아오신 세월.
말없이 삼켜온 희생과 인내의 시간.
자식 걱정만 가득 안고, 세상 좋은 구경 한 번 못 해보신 채 살아오신 그 삶의 무게는, 지금 굽은 허리와 닳아버린 손가락 마디마디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것이 바로 어르신의 인생이 남긴 표적이자, 가슴 깊이 울림을 주는 이야기다.
오뚜기처럼 허리를 펴고 스스로 일어나 걸어보려 하시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시고, 얼굴 여기저기에 멍이 드신다. 그럼에도 다시 일어서려는 모습에서, 끝내 꺾이지 않는 의지를 본다.
희생과 헌신, 사랑으로 키워낸 흔치 않은 삶. 그 깊은 내면을 전해주신 우리의 어르신이 참으로 존경스럽다. 부디 그 아름다운 미소 잃지 마시고, 건강하게 지내주시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