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살아가는 법
아침이면 어김없이 복도를 걷는 어르신이 계신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길. 운동 삼아 천천히 복도를 왕복하시는 모습은 어느새 이곳의 풍경이 되었다. 걸음걸이는 어딘지 모르게 당당하고 멋지다. 마치 오래된 영화 속 주인공처럼, 어깨가 곧고 포즈에는 익숙한 세련됨이 배어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훤칠한 체격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단숨에 끄신다. 그러나 그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건, 그분이 지닌 고운 성품이다. 늘 웃음을 머금고 계시고, 다른 어르신들에게 먼저 다가가 안부를 묻는 따뜻한 분. 특히 연약해 보이는 분들, 말수가 적은 분들에게 더 다정하고 조심스레 다가가시는 모습이 참 인상 깊다.
어르신의 일상은 조용하고 단정하다. 책을 읽거나, 퍼즐 맞추기를 좋아하셔서 언제나 곁엔 그림 퍼즐 상자가 쌓여 있다. 시간을 천천히, 그러나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으려는 그 나름의 노력이다.
그런 그분에게도 한때는 거친 바람이 불었던 시간들이 있었다. 과거엔 사업도 크게 하셨고, 돈도 많으셨다. 하지만 술, 도박, 사기… 여러 복잡한 일들로 인해 결국 가정과 일 모두를 잃으셨다고 한다. 그 시절을 돌이켜보시며, “그땐 정말 돈이 계속 나올 줄만 알았지…” 담담하게, 그러나 어딘지 멋쩍은 표정으로 말씀하신다.
힘든 시간을 거쳐 정신적인 치료도 받으셨고, 지금은 많이 차분해지셨다. 이제는 스스로 하루 스케줄을 짜서 프로그램 참여, 바둑, 장기, 화투 놀이, 퍼즐 놀이 등으로 시간을 채워가신다. 외로움을 떨쳐내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다. 가끔 농담도 던지며 주변 분위기를 띄우시고, 모두와 어울리려는 그 노력들이 참 고맙다.
하지만, 단 하나.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이 있다.
그건 바로 ... 단팥빵이다.
어르신에게 단팥빵은 그저 간식이 아니다. 하루의 리듬이자, 삶의 위안이고, 지켜야 할 자기만의 질서다.
한 달 치 단팥빵을 날짜별로 나누어 두고, 매일 하나씩 정해진 시간에 꺼내어 드신다. 보약처럼 소중하게. 그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면, 누구도 그 소중함을 가벼이 여길 수 없다.
그런데 혹시라도 누군가 실수로 하나를 먹었다? 순식간에 큰소리와 다툼으로 번진다. 평소 조용하고 인자하시던 분이, 그 순간만큼은 사나운 라이온킹으로 변한다. 그 냉장고를 향한 예민한 시선, 정확한 갯수 세기, 작은 변화도 놓치지 않으려는 그 집중력. 이건 단순한 집착이 아니라, 어쩌면 옛날 남에게 모두 사기당했던 경험에서 비롯된 불신과 상실감의 흔적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것을 지키지 않으면, 또다시 모든 것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 안에 감춰진 상처가 느껴질 때, 우리는 오히려 조심스러워진다.
가끔, 어르신은 창밖을 오래도록 바라보신다. 그 시선은 먼 곳에 가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아주 조용한 그리움이 눈가에 머물러 있다.
가족 면회가 있는 날이면, 아침부터 들뜬 얼굴로 창밖을 향해 온종일 앉아 계신다. 식사도 잊은 채, “오늘은 예쁜 딸내미 온다~ 손주들도~” 하시며 미소를 지으신다. 그 미소는 이 세상 어떤 음식보다 따뜻하고 깊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가족을 사랑하고, 기다린다.
어르신에게 가족은 삶의 이유이고, 희망이고, 마지막 남은 기대일지도 모른다. 지금, 이 생활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려 애쓰고 계시지만, 그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함께 지내고 싶다"라는 바람이 남아 있다.
그분은 말씀하신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정말 소중한 게 뭔지 알겠더라"라고.
인생은 한 치 앞도 모르고, 가장 빛나던 시절은 '화양연화'처럼 홀연히 지나가 버렸단다. 그걸 깨달았을 때쯤, 황혼 역 앞에 와 있었다며 쓴웃음을 지으신다. 하지만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어르신은 이미 충분히 잘 살아오셨고, 가족에게는 언제나 큰 울타리이자 기둥 같은 존재이셨습니다"라고. 조용히, 묵묵히, 그러나 뜨겁게 인생을 살아오신 그분의 모습은 누구보다도 우직한 아버지, 그리고 끝까지 멋진 라이온킹으로 기억될 것이다.
어르신, 꿈과 희망을 꺾지 마시고, 늘 행복하시길.... It’s been a long time. 하지만 앞으로의 시간도 분명 당신에게 소중하고 빛날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