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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ll한 캘리걸이 되고 싶어

2025-01-30 목요일

by may
KakaoTalk_20250413_120608817.jpg 저절로 'chill'해지는 캘리포니아의 풍경


어제는 UCI에서의 첫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Introduction to Sociocultural Anthropology'라는 교양과목의 시험이었는데, 대면으로 직접 시험장에 가서 OMR과 같은 용지에 마킹을 해야 하는, 상당히 기억력이 요구되는 시험이었다. 한동안 공부에는 완전히 손을 놓고 있었는데, 갑자기 다시 공부를 하려고 하니 손에 잘 잡히지가 않았다.


사실 꼭 좋은 성적을 받을 필요는 없다. 교환학생 생활에서 받은 성적은 내가 본교 성적에 반영하지 않는 이상 성적표에 기록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험 전날이 되기까지도 공부를 시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시험 전날이 되자 엄청나게 불안해지게 되었는데, 이는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험에 임한 적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나는 항상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는 것을 목표로 공부에 임해왔다. 시험 한 달 전부터 3-4일 간격으로 과목을 돌아가며 최소 2회독을 마칠 수 있도록 계획해서 공부했다. 이렇게 대비를 하고 나면 대부분의 내용은 머릿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시험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가끔 학교 행사, 수행평가 등으로 시험 준비 시작일이 미뤄지게 되면, 내가 정한 계획을 완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에 불안감에 휩싸이곤 했다. 대학교에 들어와서도 보통 시험 한 달 전부터 공부를 해왔으며, 3학년, 4학년이 되어 전공수업에 익숙해진 뒤부터는 대부분의 과목에서 A+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나에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치르는 시험이라는 것은 거의 생애 처음 있는 일이었고, 시험 전날임에도 대부분의 내용을 모르는 나를 보며 '이래도 괜찮은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선택해서 공부를 하지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불안감이 음습했다.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도 예민해지고, 왠지 모르게 식욕이 폭발해서 커다란 허쉬초콜릿 바 하나를 10분 만에 다 먹어버리기까지 했다!






이런 내 모습에 '현타'를 느낀 나는 시험 전날 밤 친구에게 이렇게 말을 꺼내보았다. '내일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어.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고 예민해지는지 모르겠어.'


친구는 "It could be a kind of PTSD"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이거 정말 PTSD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TSD는 크고 충격적인 단 한 번의 사건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작고 반복되는 스트레스성 사건들이 계속해서 발생하면서 생겨날 수 있다. 나는 시험을 앞두고 엄청나게 불안해지는 경험을 여러 번 반복해서 경험했다 보니, 중요한 시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험'이라는 자극에 앞서서 자동으로 불안함을 느끼게 된 것이었다. 굳이 불안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도 불안함을 느끼는 내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이 자극과 반응 간의 깊고 오래된 연결고리를 끊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PTSD를 치료하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왜곡된 사고방식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를 내 상황에 적용시킨다면, 시험을 잘 못 보더라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수요일에 시험을 끝내고 나온 내 마음은 말 그대로 '후련함'이었다. 생각보다 아는 문제들이 많았고 시험을 아주 못 봤다고도 생각되지 않았다. 다만 그냥 시험을 끝냈다는 마음 자체로 후련하고 기분이 좋았다. 아마도 이런 경험을 반복하다 보면 나의 작은 PTSD도 언젠가는 극복할 수 있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느긋하고 편안한 캘리포니아 문화에서 살아가다 보면, 나도 언젠가는 'chill'한 캘리걸이 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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