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초록 바람소리가 쏟아지는 여름의 해질녘이었다. 박완서 작가의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다시 읽었다. 돌아가시기 한 해 전에 출간되었기에
‘아직도 글을 쓸 수 있는 기력이 있어서 행복하다. 쓰는 일은 어려울 때마다 엄습하는 자폐自閉의 유혹으로 부터 나를 구하고,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지속시켜 주었다. 또한 노후에 흙을 주무를 수 있는 마당이 있는 집에 산다는 것도 큰 복이다.’
라고 책머리에 말씀하셨다.
마당을 돌보는 일은 선생님께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산문집을 발간하는 데에 있어 글감으로도 한몫 거들었다. 나도 선생님처럼 오래도록 글을 쓰고 싶다는 다짐을 해보았다. 그러려면 건강을 챙겨야지. 아무렴, 먼 훗날 내 몸이 노쇠하더라도 총기를 유지해야 책을 한 권이라도 더 출판할 수 있겠지.
땅거미가 뉘엿뉘엿 내려앉은 탓인지 눈이 침침했다. 그래도 눈을 비벼가며 독서를 멈추지 않았다. 요즘 들어 책을 얼굴 가까이에 대면 글자가 흐릿하게 보이고 멀리 거리를 두면 오히려 또렷하게 보인다. 내 눈의 노화현상을 체감하는 진행형인지라, 독서가 눈의 피로를 높이는 것은 아닌지 살짝 걱정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알곡만을 골라 밥을 지으려는 정성스런 마음으로, 문장에 밑줄을 그으면서 읽어내려 가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좋은 글은 책을 읽는 나의 안목에 따라 매번 감동이 달라진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예전에 밑줄을 쳤던 문장이라도 연필로 선의 굵기를 달리하며 덧입혀 긋기를 반복했다. 또한 새롭게 감흥을 주는 글귀가 나오면 별표나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정독했다.
<친절한 나르시시스트들>에는 선생님의 일본 여행담이 일부 나왔다. 그 중 삿포르 역전 서점 기노쿠니야에서 『맛있는 카디건 뜨기』라는 뜨개질책을 읽으시는 대목이 나왔다. 출판사의 뜻인지, 저자의 뜻인지, 책 제목이 독특하고 참신한 것 같았다. ‘멋있는’이라는 상투적인 제목이 아니라 ‘맛있는’이라고 짓다니. 글을 쓰고 난 뒤에 제목을 짓는 일로 심사숙고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제목 짓기의 어려움을.
누군지도 모르는 일본 작가와 출판사의 작명 실력에 감탄하며 박완서 선생님께서 몇 장에 걸쳐 쓰신 뜨개질에 대한 추억을 읽었다. 선생님은 이삼십 대에 자녀를 위해 뜨개질을 많이 하셨단다. 그때 어렵게 구한 일본 뜨개질책은 꿈의 교본이었는데, 책에 나와 있는 대로 게이지를 내고 치수를 맞춰 코수를 계산해서 뜨면 기가 막히게 잘 들어맞았다는 부분에서는 선생님의 환하고 명랑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나도 나지막이 웃었다. 한국에 돌아와 때때로 꺼내보기 위해 책을 구매해 오셨다는 문장을 읽고, 책 제목을 내 마음에 담기 위해 앞장을 넘겼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제목이 『멋있는 카디건 뜨기』였다. 내 눈에 ‘맛있는’으로 읽혔던 글자가 원래 ‘멋있는’이었던 것이다. ㅏ와 ㅓ 사이에, 내 눈의 노화 현상인 원시遠視가 숨어 있었다. 인생시계에서 마음은 생동감 넘치는 봄의 푸른 계절에 마냥 머무르고 싶은데, 어느 덧 신체는 가을로 기울어졌으니 시력 저하로 원근의 조절이 약해지는 것 또한 노화 현상의 자연스러운 섭리가 아니겠는가.
그래도 원시遠視로 인한 착각이 일상생활에서 낯익은 풍경이 될까봐 야속했다. 나는 인생의 늦겨울에서조차 내가 쓴 작품집의 퇴고는, 내 눈으로 직접 완벽에 가깝게 하고 싶은 바람을 항상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혈을 쏟아부은 노력의 결정체로 탄생한 내 수필에서만큼은 ㅏ와 ㅓ 사이에, ‘정상 시력’이 존재하기를 바라는 것은 부질없는 욕심일까.
그나저나 박완서 선생님처럼 필력을 오래 유지하려면 내 눈 건강부터 신경 써야겠다. 건강을 위해 마당 있는 집을 구하기는 당장 어려운 일이니, 나는 궁여지책으로 며칠째 눈에 좋다는 결명자차를 주전자 한 가득 끓이는 중이다. 유감스러운 원시遠視가 더디게 오기를 소심하게 염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