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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영 Aug 31. 2024

월하정인

오늘처럼 달빛이 밝은 날에는 누구를 만날까?

  아파트 숲 우듬지 위로 교교한 달빛 조각이 소담스럽게 쏟아져 내린다. 넋 놓고 달을 바라보다가, 간송미술전에서 기념품으로 사온 공책을 꺼낸다. 신윤복의 ⌜월하정인⌟이 표지다. 신윤복의 풍속화에는 달을 소재로 그린 작품이 많다. ⌜월야밀회⌟ ⌜야금모행⌟등이 있는데, 달은 문학이나 회화에서 중요한 오브제임을 다시 한 번 환기해 본다. 

  달밤에 두 연인이 담 모퉁이에 서 있다. ‘달은 침침해 밤 3경이 되었는데,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 알겠지.’ 그림 속에 쓰인 글귀는 조선 선조 때 좌의정을 지낸 김명원의 시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초롱불을 든 남자와 쓰개치마를 둘러 쓴 여인이 옷깃을 만지작거리며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나에게도 전해진다. 


  나에게도 월하정인이 있다. 단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분에 넘칠 만큼 여럿이다. 새로 사귄 이도 있지만, 어떤 이는 오랜 기간을 달밤에 만났으니, 정분이 나도 보통 난 것이 아니다. 시간으로 따지면 남편보다 오래 붙어 있고, 때로는 이유 불문하고 무조건 그의 편을 들 때도 있다. 

  그들은 바로 책을 쓴 작가이거나 책 속 등장인물이다. 나는 독서를 할 때면 가끔 너무 감정 이입을 하거나 상황에 몰입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내 눈 앞에서 작가나 등장인물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몇백 년 전에 살았던 작가라도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오늘처럼 달빛이 밝은 날에는 누구를 만날까? 달밤의 서정과 서사가 언어로 유려하게 표현되어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이 떠오른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서는 달밤의 묘사가 인물들의 격정적인 감정과 자연의 거친 아름다움을 강조하는데 쓰였다.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서는 달밤의 분위기가 인물들의 상황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윤후명의 『달의 모양』에서는 달빛 아래에서의 사랑과 상처, 치유가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한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는 달밤에 등장인물이 걸으면서 느끼는 감정들이 잘 표현되어 있다.

수필 연계 추천 도서 : 출처 -알라딘 서점

  나는 지금, 고요한 달밤에 어울리는 윤오영 선생님의 수필을 음미하고 있다. 내가 처음 선생님의 작품을 접한 것은 교과서에 실린 ⌜방망이 깎던 노인⌟이었다. 글을 곱씹어 정독할수록 마음속에 울림의 파장이 넓게 퍼져나갔다. 그때의 밀도 높은 감동이 되살아나기를 기대하며 오늘은 ⌜달밤⌟의 문장에 취한다.     

  맞은편 집 사랑 툇마루엔 웬 노인이 한 분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달을 보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그리로 옮겼다. 그는 내가 가까이 가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아니했다. “좀 쉬어가겠습니다.”하며 걸터앉았다. 그는 이웃 사람이 아닌 것을 알자 “아랫마을서 오셨소?”하고 물었다. “네. 달이 하도 밝기에…….” “음! 참 밝소.” 허연 수염을 쓰다듬었다. 두 사람은 각각 말이 없었다. 푸른 하늘은 먼 마을에 덮여 있고, 뜰은 달빛에 젖어 있었다. 
  노인이 방으로 들어가더니 안으로 통한 문소리가 나고 얼마 후에 다시 문소리가 들리더니, 노인은 방에서 상을 들고 나왔다. 소반에는 무청김치 한 그릇, 막걸리 두 사발이 놓여 있었다.     

  


  윤오영 작가는 마치 한 폭의 정물화를 보듯 시골의 달밤 풍경을 수필로 그렸다. 우연히 노인을 만나 따뜻한 인정을 체험하는 묘사가 아주 뛰어나며, 도화지 위의 사물 사이 공간에 여백의 미를 표현하듯 많은 이야기를 함축해서 더욱 시적인 아름다운 글이 되었다. 지그시 눈을 감는다. 향기로운 문자향이 내 온몸을 감싸는 것 같아 황홀하다. 

  세상은 변해도 책의 본질은 변하지 않으리라. 일상에서 문득 느끼는 군중 속의 외로움과 좁은 시야에 갇혀 거시적 안목으로 주변을 보지 못했을 때의 불안감이 독서를 통해 희미해지는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월하정인들 덕분이다. 내가 타성에 젖지 않고 지적 편식에 길들여지지 않도록 항상 나를 주시해 준다. 나는 나를 일깨워주는 그들의 말에 오늘도 귀를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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