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여행 전날, 한참 늑장을 부리다가 일어난 우리. 출발 하루를 남기고 본격적인 짐싸기에 돌입하는데 챙겨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심지어 장모님 댁에 있는 것들까지! 그러나 부부에게 불가능은 없다. 백화점 쇼핑도, 아닌 밤중에 장모님 댁 다녀오기 끝에 새벽 3시를 넘긴 짐싸기. 우리... 발리 갈 수 있겠지?
새벽 4시 반. 요란하게 울리는 알람이 우리를 마구 흔들어 깨웠다. 나는 잠들었던걸까? 잠든 기억이 없는데... 어쨌든 감았던 눈을 잠깐 뜨고 보니 일어날 시간이었다. 마침 아내도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나는 한 번 끙-하고 힘을 모으고서는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7월 24일이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오늘이 그렇게 고대하던 신혼여행 가는 날이라니.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내가 발리에 다녀왔다는 것이 막 실감나진 않는다. 실감이라는 건 뭘까? 현실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실감인가? 아니면 비현실적인 일들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실감이려나. 그렇다면 실감이란 참으로 실체가 없는 것이 되겠다. 비현실적일 거라고 생각하며 기대하던 7월 24일의 아침이 현실이 되자 참 비현실적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도 해는 동쪽에서 뜨고 날씨는 여느 여름날같이 무더웠으니까.
우린 집을 나섰다.
공항버스 기다리는 중
자 오늘 떠나요. 공항으로. 핸드폰 꺼놔요. 날 찾지 말아줭. 노랫소리가 절로 흥얼거리는 아침이었다. 푸르스름한 새벽에 걸친 우리의 첫번째 이동수단은 공항버스였다. 최대한 간편한 차림으로 나온 우리는 공항버스에 몸을 실었다. 인천공항까지는 대략 1시간 30분. 마침 잠을 얼마 자지 못했던 터라 옳다쿠나 하고 우리는 버스 의자에 뚝-을 대고 정신없이 잠들었다. 눈을 떠보니 어느새 인천공항.
하얀 캐리어의 무게가 몹시 상당했다. 해외 여행이 처음이었던 나에게는 해외로 출국하기 위해 거쳐야하는 과정들이 몹시 두려운 것이었다. 탑승 수속부터 수화물 부치는 것까지 머릿속으로는 뭘 해야하는지 알지만 경험이 없으니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할지 잘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아내는 척척박사기 때문에 내가 어리버리해지면 야무지게 리드해줘서 헤맬 일은 없었다. 일찍 일어나 인천공항에 와서 주린 배는 교통수단 불문 공통으로 터미널에 있는 롯데리아에서 해결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롯데리아 햄버거를 먹은 것이었다.(귀막아 버거킹)
한우 불고기 버거
당일 발리에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표 발권 및 수화물을 부치기 위해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보며 이 사람들과 함께 발리로 간다는 것이 뭔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탑승수속을 마치고 나서 우린 출국장으로 향했다. 이번 신혼여행에서 매우 큰 즐거움 중 하나였던 면세점 쇼핑의 시간인 것이다.
가장 먼저 산 것은 아내의 향수였다. 향을 좋아하는 나는 아내에게 향수 컬렉션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이전에 샤넬 마드모아젤과 불가리도 공항 면세점에서 구입했었는데 그때도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다양하고 좋은 향을 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아내가 그것들을 여러가지 고르고 원하는 걸 사용할 수 있도록 많이 사주고 싶다는 생각이다. 예쁜 향수병이 가지런히 줄을 선 화장대의 모습은 볼 때마다 왠지 뿌듯하다. 가장 최애 향수는 루이비통의 아트라프-레브인데 아내에게 정말 찰떡같은 향이다.
출국 쇼핑의 단연 백미 프라다 지갑...같은 가방이다. 아내에게 항상 좋은 지갑이나 좋은 가방을 사주고 싶었던 마음이 컸었다. 처음에는 지갑을 사려고 했었으나 역시 세련된 깔끔함은 프라다만한 게 없는 것 같다. 프라다 매장에 처음 들어가서 저 지갑...같은 가방을 보는 순간 이거다! 싶었다. 그래서 다급하게 아내를 불렀다. 본래 쇼핑을 할 때 단번에 물건을 고르는 나로서는 사실상 거기서 쇼핑 끝이었다. 하지만 꼼꼼한 아내의 뜻에 따라 조금 더 다른 매장을 둘러보았지만 모든 매장을 둘러본 결과 역시 결정은 바뀌지 않았다. 아내에게 예쁜 선물을 할 수 있어서 몹시 기분이 좋았다. 내 걸 사는 것도 몹시 기분이 좋겠지만 아내에게 선물을 하니까 더 기분이 좋았다.
탑승구 261. 가루다 인도네시아 항공의 유니폼을 입은 한국인 직원들의 모습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설레는 비행기 탑승을... 하려나 했는데 출발이 약 20분 가량 지연됐다. 현재까지 경험상 비행기가 제 시간에 출발하는 것은 아직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지연되더라도 갈 비행기는 결국 가기 마련이다.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설레는 비행기 탑승의 시간이 온 것이다. 비행기에 타자 인도네시아 현지인 승무원들이 반겨주었다. 다들 용모가 수려하고 키가 크셨는데 그 분들을 보는 순간 '아 이 비행기가 정말 발리로 가는구나.' 싶었다. 승무원분 중에는 눈에 띄게 예쁜 분이 계셨는데 아내와 함께 계속 보면서 감탄과 칭찬을 했다.
설레는 이륙 후에 잠깐은 정신없이 잠들었다. 곧 잠에서 깨니 승무원 분들이 음료를 권하였는데, 비행 내내 인도네시아의 맥주인 빙땅을 아주 야무지게 마셨다. 한 다섯 캔은 마셨던 것 같다. 생각보다 고소하고 맛이 좋았다. 아내도 잠에서 깨자 나는 야심차게 준비해온 것을 꺼냈다.
그것은 바로 닌텐도 스위치. 미니게임 시리즈다. 가격은 약 42,000원. 실로 놀라운 준비력이 아닌가. 그렇게 나는 아내가 흥미를 가질만한 게임을 골라 하나 둘 같이 해보았다. 본 실력대로 했다가는 아내가 자꾸 져서 흥미를 잃을까봐 나는 봐주려고 했는데... 뭔가 이상했다. 분명히 안 봐주고 있는데 내가 자꾸 진다. 이번 여행 중 두 번째로 당황스러운 일이지 않나 싶다. 아내는 정말 못하는 게 없나보다.
한껏 당황한 눈
그렇게 한창 재밌게 게임을 하던 중 기대하던 것이 왔다. 그것은 바로 기내식.
커리와 불고기덮밥이다. 가루다 인도네시아 항공의 기내식은 솔직히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도 항공은 역시 대한항공 아니겠어?' 라고 생각하는 국뽕맨이었던 터라 아무런 기대 없이 기내식을 입에 인서트하였는데, 오잉? 생각보다 몹시 맛있었다. 특히 당연히 계란찜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디저트의 맛이 몹시 훌륭했다. 그렇게 기내식도 야무지게 한사바리 해치우고 나니 어느덧 발리에 도착할 시간이 되었다.
당시 비행기에 타서 계속해서 창문 밖을 주시했었다. 사실 발리의 날씨가 하루종일 비가 오고 흐리다는 예보를 전날에 봤기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신혼여행 전날부터 아주 재를 뿌리듯이 기분이 좋지 못했다. 일생에 한 번인 신혼여행인데 성수기 발리가 날씨가 일주일 내내 비 예보라니! 정말 절망스러웠다. 공항에서도 발리 간다고 들뜨다가도 어차피 날씨가 안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정말 김이 팍 샜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발리에 가까워져갈수록 구름은 많이 없는지 지켜보았는데 놀랍게도 발리는 매우 화창한 하늘이었다. 어떤 자식이 예보를 그딴식으로 했는지는 몰라도 만나면 혼내주고 싶다.
두근거리는 착륙시간. 발리의 응우라라이 공항에 착륙하는데 정말 멋지게도 바다에서부터 아주 낮은 고도로 내려와 착륙했다. 낭만 넘치는 착륙이었다. 주변의 모습을 둘러보는데 묘하게 발리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뭔가 여기도 서울 어디일 것 같은 그런 느낌? 건물이 이국적이긴 했지만 해는 똑같이 떠있고 풀은 초록이니까 그랬나보다. 당연한 일들이지만 발리라고 해서 드라마틱하게 오자마자 확 다르게 느껴지는 실감나게 만들 만한 것들은 없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공항으로 와 입국 수속을 하려는데 독특한 향냄새가 나는 것이 상당히 신기했다. 공항같은 공중 시설에 이런 향냄새라니. 종교적인 것일까? 아님 모기향인가? 하는 다양한 생각을 했다. 주민들의 대부분이 힌두교도인 발리라서 그런지 공항에도 신상이 매우 많았다. 발리에 입국하기 위해 필요한 서류들은 모두 구비를 해왔다. 세관신고도 인터넷으로 미리 했고 입국 비자도 발급해놓은 상황이었다. 이제 입국 수속이 남았는데 이제 진짜 외국인과 대화를 하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한 것이다. 정규 영어교육을 받은 지 어언 10여년. 국어를 전공한 나는 그동안 외국어 청정지역에서 살고 있던 터라 실전에 돌입하자 몹시 떨렸다. 그렇다고 지금 영어 까막눈인 것은 아니지만 몹시 긴장됐다. 뭔가 안녕하세요 해야할 것 같은...
긴장한 뒷모습
처음 해외에 나오니 몹시 긴장되었다. 정말 그때의 긴장감은 여태까지 살면서 경험해보지 못한 긴장감이었다. 낯선 곳에 떨어졌다는 두려움과 내가 익숙한 모든 것들에서 격리되어 있다는 느낌이 나를 강하게 덮쳐왔다. 나는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하지만 오늘을 위해 열심히 준비를 해두었으니 준비한 대로만 하면 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수화물을 찾고 가장 먼저 향한 곳은 XL Axiata였다. 유심침을 사용하기 위해 쿨록?인가 뭔가로 사전에 구매를 해두었고 매장에 가서 유심칩을 바꿨다. 그런데 그 과정이 생각보다 길었다. 아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긴 비행에 아내도 조금 지친 것 같다. 그리고 공항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나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어찌저찌 유심칩을 바꿨으니 두 번째 해야할 일은 바로 환전이었다. 원래 계획은 달러로 100달러를 환전하고 루피아로 100만 루피아를 환전할 계획이었다. 입국장을 통과하니 다양한 환전소와 환전을 위한 ATM이 있었다. 어떻게 해야 달러를 뽑을 수 있을지 한참을 보다가 먼저 ATM으로 향했다. 정말 구린 인터페이스였다. 블루 스크린에 딱딱한 글씨체. 아마 1900년대 말 컴퓨터 화면이 저렇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달러 환전을 찾아보았는데...
100만 루피아면 약 8만원인데 지갑이 너무 빵빵해졌다.
없다. 아무리 찾아봐도 달러를 인출하는 기능이 없었다. 몹시 당황했지만 일단 루피아를 먼저 뽑자는 생각에 루피아를 뽑았다. 루피아는한국돈에 0.85원 정도로 계산하면 간편했다. 그렇게 다른 ATM도 찾아보았지만 어디서도 달러를 뽑을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큰 마음을 먹고 환전소의 직원에게 물어보았다. 달러는 어떻게 뽑냐고 물어보니 환전소 직원은 나보다 유창하지 못한 영어로 무어라 말을 하는데 도무지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이건 정말이지 예상 밖이었다. 해외에 나가서 내가 영어를 못해서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상상은 해봤어도 상대방이 영어를 못해서 겪는 어려움은 생각을 못해본 것이다. 그 인도네시아 특유의 발음이 문제였는데 참 난감했다. 여태 영어 수업 들을 땐 교보재가 항상 유창한 백인 남성 여성 말투로만 말하니 이런 어려움이 생기는 것 같았다.
계획했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마음이 너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원래 일사천리로 이루어져야했던 일인데 진전은 없고 시간은 너무 많이 흐르게 되자 정말 등에 식은 땀이 났던 것 같다. 해외 여행의 무서움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아내가 순간순간마다 너무 당황하지 말라고 다독여준 덕분에 더 우왕좌왕하지 않았다.
어쨌든 환전소 직원에게 문의한 결과 달러는 뽑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걸 어떡하나 싶은 순간에 문득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가이드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한 터라 오래 기다렸을텐데... 싶다가 현지인 가이드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 낯을 몹시 가리는 본인으로서 8박 10일의 여행 중 3일 가량의 여행사 일정을 함께 해야하는 가이드이기 때문에 조금 긴장이 되었다.
그런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게이트를 나서자 입국하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팻말을 들고 있었는데 한 눈에 우리 부부의 이름이 적힌 하얀 팻말을 찾을 수 있었다. 가이드 분께서는 첫눈에 보기에 인상이 강렬한 분이었다. 덕분에 긴장이 배가 된 상태로 다가갔다. 나는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한 마음을 담아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