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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찬민들레 Oct 25. 2024

90일 천하로 끝난 첫 직장의 매운맛.

사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나만의 가치 찾기

나의 취업준비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취준생으로 살았던 시간은 1개월이 채 되지 않았으니 오히려 짧았다 는 게 맞는 말이겠다.

2월 말에 졸업하고 첫 직장 출근을 3월 중순에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나는 왜 그 시간이 너무나 힘들고 어려웠던 기억으로 남아있을까.

앞으로의 진로를 조금 더 고민하고 직장과 직업 선택에 좀 더 신중을 기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리도 조급하고 불안한 시간으로만 그 시간을 채웠는지 모르겠다.

물론 지금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하루에도 수십 군데 이력서를 넣고 매일매일 휴대폰을 붙잡고, 

좌절감과 절망으로 잠자리에 들었겠지.

복수전공자라는 꼬리표에 스스로를 가두고 지레 겁먹고 안될 거야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4학년이 되던 해 12월부터 수많은 복지관, 센터, 심지어 병원까지 이력서를 넣었지만 계속 응답이 없는 휴대폰을 붙잡고 있다가 이대로 시간만 보내느니, 어디라도 취업해서 경력을 먼저 쌓아야겠다 생각했다.     

마침내 연락이 온 곳은 요양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특별시립 요양원이었다. 치매센터와 함께 운영되고 있던 그곳은 규모도 크고 입소 인원도 꽤 많은 규모 있는 시설이었다.

요양원과 치매센터로 나누어져 있었지만 각 기관의 사회사업팀은 한 부서처럼 움직였고 덕분에 많은 선배님을 만나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사실 노인이든, 장애인이든, 생활시설은 사회복지 분야 중 비인기 분야이다. 

(생활시설 사회복지사 선생님들께 존경을 표합니다.) 

거동이 불편한 대상자를 하루 24시간 케어해야 하고 그만큼 내내 긴장의 시간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요양원이 바로 대표적인 생활시설 중 하나인데 그곳에서 사회복지사로서의 첫걸음 시작하게 된 것이다.

모두의 우려와 응원 속에서 나는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스물넷의 어린 패기와, 열정에 찬 신입 사회복지사로서의 첫걸음을 시작했다.     

첫 직장으로 요양원에 입사했을 때, 주변 지인들은 더 좋은 기회가 있었을 텐데... 

또는 조금 더 기다려보지... 하는 아쉬운 조언을 한 마디씩 보태곤 했다.

하지만 나에겐 오히려 요양원에서의 경험이 지금까지 사회복지 현장에 남아있는 큰 기준점이 되었던 시간이었다.

목적지를 먼저 다녀온 자의 여유를 획득했다고나 할까.


인간이 가장 약해졌을 때의 모습을 가감 없이 직면하고 그런 상태에서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빠르게 판단하고 사회복지사로서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명쾌하게 구분하는 법을 일찌감치 터득했다. 

비교적 담당자의 독립성이 보장되는 요양원이었기 때문에 병아리 신입 사회복지사였지만 오히려 더 많은 프로그램을 직접 기획하고 진행해 볼 수 있었고, 단순히 사업 진행뿐만이 아니라 시설, 회계까지 많은 분야에 대해 폭넓게 경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선생님~ 오늘은 꽃꽂이하는 날이지요? 선생님이 오시고서 우리 활동시간이 늘어서 너무 좋아요~     


출근 후 첫 일과는 어르신들이 잘 주무셨는지 라운딩으로 인사를 드리는 일이었다. 

손녀보다도 더 어린 나를 꼬박꼬박 선생님이라고 부르시던 분이 계셨는데 그 옛날 미국에서 간호사로 근무하시다가 노년은 한국에서 보내고 싶어 다시 들어오신 분이었다. 척추장애가 있어 거동이 불편하신 탓에 걸을 때마다 의료용 워커(네발 지팡이처럼 몸이 쓰러지지 않게 지지할 수 있는 보행보조기)에 몸을 의지해야 했던 분이었다. 

항상 뵐 때마다 웃으며 반겨주시고 요양원 이모저모를 많이 알려주셨던 분이라 짧은 시간에 정이 많이 들었고, 내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빠지지 않고 항상 참여하셨던 분이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게 출근한 어느 날,

팀장님이 간밤에 사망자가 있으니 가족들에게 연락해서 사망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하셨다.

알고 보니 바로 그 할머니였다. 

인지능력도 좋은 편이었고, 척추장애 외에는 특별히 신체질환도 없는 분이었는데 간밤에 주무시듯 돌아가셨다고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말 그대로 너무 어이가 없었다.      




바로 어제 나랑 꽃꽂이했는데?? 내일 봐요 선생님~ 하고 인사하셨는데??     


다른 직원들은 늘 있는 일이라는 듯이 너무나 평온하고 당연하게 가족들에게 연락하고 사망절차를 밟았다. 그런데 더 당황스러운 것은, 가족들에게 할머니의 사망 소식을 알렸음에도 나 몰라라 한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할머니는 사망한 배우자와 재혼을 했고, 배우자가 사망하자 친자가 아닌 자녀들과는 거의 연락을 하지 않고 지냈던 것이다.

어찌어찌 요양원 절차에 따라 무연고자 사망처리를 한 후 나는 다소 침울했고, 혼란스러웠다.


할머니는 본인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계셨을까?

입소 할머니의 죽음에 이토록 마음이 헛헛한 게 당연한 건지 이상한 건지 혼란스러웠다.

평온히 업무에 복귀한 직원들을 보고는 나만 또 이방인이 된 것만 같아서 속상했고,

내가 좋아하던 할머니의 죽음이 그냥 우리가 숨 쉬듯 당연한 한 순간임이 허탈했다.   

  

그때가 내 첫 직장에서 맞은 첫 번째 위기였다.

돌이켜보면 차가운 머리를 가져야 하는 사회복지사로서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생의 마침표임을 인지하고 대상자와 감정교류의 마지노선을 잘 지켰어야 했는데 마음이 앞섰던 나는 그 할머니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 깊숙이 들여놓았다. 그때는 그분이 마음속으로 들어오는지 아닌지 생각도 못했지만 돌이켜보니 그랬던 것 같다.   

  

할머니의 사망 소식에서 혼자만 아직 벗어나지 못한 어렸던 나에게 두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바로 원장님이었다.

우리 원장님은 기관장으로서의 품위와 예의, 진중함과 품격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는데 (적어도 내 기준에는) 이런 행태가 쌓이고 쌓여 꿈속에서 원장님과 싸우는 지경(?)에 까지 이른 것이다.

말단 중의 말단이었던 나에게까지 불똥이 튄 일은 없었지만 원장님 이하 국장님, 팀장님을 대하는 무시와 폭언 그리고 이사장님 내외를 대하는 그 아부와 자본주의 미소는 보면 볼수록 적응이 안 되는 것이었다.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이던 5월, 

어버이날은 맞아 요양원 앞마당에서는 어르신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음악회가 열렸다. 

매일 일상을 보내는 생활시설에서의 행사 중 나름 큰 행사였기 때문에 이사장님을 비롯한 기관장님들이 참석하셨고, 이 날의 행사를 위해 사회사업팀 직원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행사 당일, 다들 바삐 움직였고, 모든 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마지막 차례에 사건이 터졌다. 무대를 마무리하는 엔딩 공연자가 차가 막혀 거의 30분가량 늦게 도착한 것이다.

사회자의 진땀 녹인 입담과, 직원들의 순발력으로 경품 순서를 먼저 진행하면서 위기는 넘겼지만 문제는 그다음.

원장님은 울그락불그락 꿈틀대는 얼굴을 겨우 진정시키고 이사장님을 배웅하셨다. 

머리가 구두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이며

이사장님의 구두에 묻은 잔디를 손수 털어주시면서.

(절대 과장이 아니라 진짜 그렇게 하셨다.)



이사장님 앞에서 완벽한 행사를 보이지 못한 원장님은 매우 화가 나셨고 직원들을 질책하기 시작했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고, 굳이 잘잘못을 따지자면 약속 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공연자의 잘못이었지만 '이사장님 앞에서의 실수'는 곧 직원들의 준비 미흡과 잘못이었다.

직원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한바탕 폭언을 쏟아내고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국장님의 정강이를 걷어차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꼴에 국장이라고 자리에 앉혀 줬더니, 제대로 하는 일도 없고!'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거의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장면이 머릿속에 사진처럼 남아있다.

백번 이해해서 그래, 화가 나면 판단이 흐려지니까 그럴 수도 있어. 

이해하려고 노력해 볼 수 있지만

모든 직원이, 막내직원까지 보는 앞에서 그렇게 중간관리자를 하대하고 막대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인간으로서, 원장으로서의 자격과 품위를 스스로 부정하는 일이었다.

말단 직원 앞에서 국장님께 반말과 쌍욕은 일상이고,

입소자들에 대한 예의도 가끔은 잊는 그분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이었다면 어땠을까.

이미 너무나 많은 동료들을 경험하고, 다양한 대상자들을 대면하고, 사망현장을 목격한 지금은 스물넷 사회초년생이었던 그때의 고민이 크게 와닿진 않는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회사 생활이 처음이었던 만큼 자본주의의 민낯이 너무 생경했고, 내 기준에서의 불의와 타협할 여지없이 완고했다.

사실 내가 못 참겠다! 를 선언해도 원장님은 타격이 전혀 없고, 요양원은 더더욱 건재하지만 스스로 포기를 선언하고 퇴사를 선택했다.     


짧았지만 매웠던 3개월간의 요양원 생활에서 나는 앞으로 내가 사회복지사로 계속 일하기 위해서 두 가지 원칙은 꼭 지켜야 한다는 것을 체득했다.


첫 번째는 존중, 두 번째는 거리.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존중이 없는 곳은 어디라도 내가 버티기 어렵고,

어느 분야에서 근무하든 대상자와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소진되지 않고 오랫동안 실천가로서 현장에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     

사실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어떤 상황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참을 수 없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도 그랬고 짧은 3개월의 직장생활에서 어쩌면 30년간 해내야 하는 직업과 직장의 선택 기준을 체득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어떤 환경을 참을 수 없고, 어느 지점에서 집중력을 발휘하는지, 사회복지현장에서 필요한 자질을 어떻게 키워야 하고 그 거리과 간극을 어떻게 넓히고 좁혀야 하는지를 짧지만 압축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첫 직장의 매운맛을 뒤로한 채, 내가 꿈꿔오던 진짜 사회복지를 위한 새로운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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