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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 쓰는 은정원 Aug 22. 2024

얼음강물을 건너온 소녀 1부 _01

앞만 보고 가는 기야




이 이야기는 허구이며, 일부 지역 또한 가상이다.






아버지를 그곳에 두고 어머니와 함께 중국으로 왔을 때 나는 만 여섯 살이었다.


아직 봄이 되지 못한 겨울의 끝, 그날의 풍경들이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들처럼 어렴풋이 기억난다.

어둡고 춥다’는 말로는 부족한, 그러나 이 말밖엔 떠오르지 않는 그 밤들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추웠다.


백강(白江)에서 벗어나 이웃 산기슭 마을로 들어섰을 때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군인 시절 동지에게 먹을 것을 구하러 가는 줄 알았다.

마지막으로 식당에 들러 농마국수 두 그릇을 셋이 나누어 먹고 나자 밖이 깜깜해져 있었다.

아버지는 능숙하게 산길로 들어섰다. 이미 반나절 넘게 걸은 후였지만 멈추지 않고 산길을 걸었다.

산은 오르면 내려야 했고, 내리면 또 올라야 했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바람은 너무 쉽게 옷 속을 파고들어 피부 위에서 썰매를 그어댔다.


이따금 아버지가 나를 업어주었는데 업히는 구간은 갈수록 늘어갔고 아버지의 걷는 속도도 점점 더뎌졌다. 우리는 가지도 별로 남아있지 않은 나무들 사이를 걷고 또 걷다가,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차디찬 바위 곁에서 서로에게 기대어 잠시 잠이 들었다.


얼음돌 같은 삶은 감자도 다 떨어진 3일째 되는 날, 먹은 것이라곤 오래전 내려 그늘에서 굳어진 눈을 입속에 욱여넣어 삼킨 게 전부였다.

바로 그날 밤이다.


매번 이 순간을 기억할 때면 내 몸은 내가 밟고 지나온 얼음강물이 돼버린다.


아버지는 우리가 걸어오는 동안 반복해서 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어머니에게 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알 수 없는 거대한 일이 내 앞에 놓여있다는 걸 알기에는 충분했다.


그야말로 으스러지도록 나를 껴안았던 아버지의 가슴과 심장박동, 팔과 등, 마른 얼굴의 피부와 각진 뼈, 단단한 어깨의 느낌이 여전히 내게 남아있다.

그런 느낌이란 결코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앞만 보고 가는 기야. 그럴 리 없갔디만, 아버지가 뒤따라가 손을 잡아당겨도, 이름을 불러도 절대 멈추거나 뒤돌아보지 말라. 그저 앞만 보고 가는 기야.”


소리를 내어선 안 된다는 주의를 수차례 듣고, 산길을 걸으며 미끄러질 때마다 연습도 했다.

그날 밤 나는 이미 소리 없이 울 수 있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앞만 보며 얼음강물 위를 걸었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은 얼굴 위에서 고드름이 되어 광대뼈를 찔렀다.

지금도 그때처럼 얼굴이 아프다.


휘청휘청 걷고 있는 어머니와 나의 발걸음 사이로 조국산하가 통째로 흔들리는 듯 바람 소리가 거칠었다.

아버지는 뒤따라와 손을 잡아당기지도,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뒤를 돌아봤다.

저 그림자들 가운데 어느 게 나무이고 어느 게 아버지인지 몰라서 슬펐다.

아마 제일 조그맣고 빛나는 저 그림자일 거야.


내가 돌아봤지만 아버지는 나를 혼내지도 못했다.

나는 이미 강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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