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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 쓰는 은정원 Aug 22. 2024

얼음강물을 건너온 소녀 1부 _02

어머니, 우리 평양에 온 겁니까?


이젠 강 이쪽이 된 강 건너의 수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장만승’이라는 조선족 남자다.

그 사람의 이름을 정확히 안 것은 그로부터 10여 년 지난 어느 겨울밤이다.


장만승은 어두운 숲길을 앞장서 인근 중국인 집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그가 뜨거운 물이 담겨있는 보온병과 속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하얀 밀가루 빵 두 개를 우리 앞에 내려놓으며 “두어 시간만 쉬시오.”라고 말한 후 방을 나가자마자, 어머니와 나는 입속으로 빵을 밀어 넣었다.


그때까지 세상에 태어나 먹어 본 것 중에 제일 맛있는 것은 사과였는데, 그보다 더 달았다.

빵을 다 먹고 나서야 아버지 생각이 났다.

눈물이 날 것 같아 눈을 감았다.

감은 눈에서도 눈물은 흘러나왔다.


날이 밝은 후 장만승은 ‘빵차’라고 부르는 조그마한 승합차에 어머니와 나를 태웠다.

우린 뒷자리에 앉고 장만승은 운전기사 옆에 앉았다. 길은 울퉁불퉁했고 차는 전쟁이라도 난 듯 요동치며 달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동차를 탄 나는 골이 터질 듯이 흔들리고 눈알이 빠질 듯이 어지러웠다.

어머니도 구역질을 참는 듯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장만승이 돌아보고 비닐봉투 한 장을 어머니에게 건네주었다. 어머니는 한 손에 비닐봉투를 쥔 채 나를 무릎 위에 앉혀 안아주었다.

차가 심하게 덜컹거려 어머니의 심장박동이 나에게 전해지진 않았지만 한결 나았다.


어느새 잠이 들었던 나는 어머니 다리 위에서 눈을 떴다. 울퉁불퉁한 길이 끝나고 평평한 길을 달리고 있었다.

일어나 앉으니 차창 밖 멀리 붉은 벽돌집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그렇게 몇 시간 달려 도착한 곳은 옌지(延吉), 연길이었다. 그때까지 본 가장 큰 도시. 건물이 높고 크고 많았다.

가게 안에는 가지런히 진열된 음식들이 보였고 간판에는 조선 글자가 적혀있었다.


“어머니! 우리 평양에 온 겁니까?”


장만승이 돌아보자 어머니가 사색이 된 얼굴로 장만승을 향해 고개를 꿈뻑하더니, 내 귀에 대고 말했다.

“여긴 중국이고 우린 중국인이다. 아버지가 한 말 잊지 말라.”


나는 산길을 걸으며 아버지와 함께 외운 것들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이곳은 중국. 나는 이제 우리 공화국 사람이 아니다.

나는 조선족. 조선말을 할 줄 아는 중국인.

나는 함경북도 백강에서 온 게 아니라, 연변(延邊)자치주 북동쪽 산골짜기 용석골(龍石溝)에서 살다가 왔다.

용석골은 중국어로 롱스꼬. 롱스꼬는 사람들이 별로 살지 않는 깊은 산골짜기.

사람을 많이 만나보지 못해 중국어가 서툴다.

어머니는 (인민학교 선생님이 아니고, 아니 이런 말은 처음부터 빼고.) 조선족 식당에서 일한다.

어머니 이름은 말할 필요 없지만, 꼭 말해야 한다면 절대 ‘송련화’가 아니라 ‘박희옥’.

중국어 발음으론 ‘퍄오-시-위’다.

아버지도 조선족인데 상하이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

우린 1년 정도 옌지에 있다가 상하이로 갈 것이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나이를 항상 ‘만’으로 말할 것. ‘만’이라는 건 한 살 적게 말하는 것.

되도록 다른 사람과는 대화하지 말고 무엇이든 어머니에게 다 말할 것.     



어머니를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어머니는 ‘아즈마이’, 나는 ‘은주’였다.

성도 붙이지 않았고 중국어 발음이 필요한지도 몰랐다.


난 대부분 주방 구석이나 식당 뒷방에서 지냈고, 손님이 없는 시간엔 늘 어머니 곁에 붙어있었기 때문에 부를 필요가 거의 없었다.

이따금 ‘은주는 아직 학교를 아니 보냈는가’라든지 ‘은주가 어려도 동작이 아주 날세다야’ 같은 소리를 들은 적은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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