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그동안 가 본 동네 책방 중에서, 시골에 위치한 인상적인 책방 몇 군데를 돌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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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동쪽 끝 마을에서 만난
달콤한 그림책방 [책약방]
‘종달리’의 ‘종달’을 새의 이름으로 유추하는 사람이 많다. 나도 그랬다.
제주의 어떤 시골이든 새가 이 정도는 다 지저귀지만, 왠지 종달리에서 들리는 새의 소리는 종달새의 지저귐일 것만 같은, 느낌이지 않나?
알고 보니 ‘종달리’는 동쪽의 끝, ‘마지막에 도착하는(終達) 마을’이라는 뜻이었다.
먼 길 달려온 김에 [책약방]에 들르기 전에 마을을조그마한 원으로 한 바퀴 거닐었다.
옛 이발소를 개조한 ‘누룸스튜디오’ 안에는 제주의 목공 문양을 간직한 창문이 그대로 남아있고, 그 맞은편 ‘잼있는 가게’는 마을 해녀들이 잠수병의 고통을 잠시 잊기 위해 먹을 수 밖에 없던 뇌선(강한 진통제)을 팔았던 ‘영신약포’를 개조한 곳이다.
그리고 동네 초등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모든 것이 있을 것만 같은 ‘승희상회’와 바다가 안 보이는(^^) 카페, 간식거리를 파는 ‘제주의 계절’을 지나 이어지는 다른 골목으로 접어들면, 독채민박 ‘이안재’의 간판이 보인다.
이안재(易安齋)는 중국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한 구절에서 온 이름으로 ‘무릎 하나 들일 만한 작은 집이지만 참 편안한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倚南窓以寄傲(의남창이기오) 남쪽 창에 기대어 마냥 의기양양하니, 審容膝之易安(심용슬지이안) 무릎 하나 들일 만한 작은 집이지만 이 얼마나 편안한가.
- 도연명(陶淵明), 귀거래사(歸去來辭) 중에서 -
이안재 입구 정낭이, 들어와도 괜찮음을 뜻하는 표시로 한쪽으로 모두 내려져 있어서 살짝 구경을 해 봤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올레’에서부터 극강의(^^) 편안함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안거리(안채)와 밖거리(바깥채)가 마주 보고있는 마당과 은행나무, 가장자리의 감나무와 그곳에 놓여있는 돌 하나까지 반드시 그곳에 있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반가운 친구가 오면 이곳을 예약해서 하룻밤 머물고 싶은 곳이었다.
골목길을 한 바퀴 돌아 종달초등학교 앞에 도착하면, 낙서가 많이 된 자그마한 건물이 보인다.
‘쓴 약보다 달콤한 그림책’을 파는 세평짜리 무인 책방, [책약방]이다.
초등학생이 40명인 마을에서, 아이들이 등하굣길에 자유롭게 머물면서 책도 보고 일기도 쓰는 공간을 만들어준 책방지기는 제주시에서 언어재활사 선생님으로 일하는 서울유학파(?^^) 귀향인이다.
제주시에서 일하며 고향인 종달리에 무인 책방(사람 대신 책이 지키는 책방)을 연 책방지기는 ‘모두가 지키는 책방’을 꿈꾸며, 아이들에게 한시적 책방지기를 맡기기도 하고, 함께 매우 근사한 ‘마을지도’도 만들고, <세대를 잇는 이야기 유랑단>에 마을 이야기를 소개하기도 했다.
자그마한 책방 안에는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적어놓은 ‘책방사용법’과 ‘자작시’도 있고, 방문객들의 비밀스런 마음을 간직한 ‘일기장’도 놓여있다.
그리고 예쁜 그림책이 참 많았는데, 그림책 중에서 나의 최애 책인 <산책>도 있어 무척 반가웠다.
종달리 [책약방]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뜻밖에도 ‘마을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자신이 나고 자란 마을을 가장 착실하게 사랑하는 방법을, 나는 이곳에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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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장이라도 발견한다면
그것은 인생책, 구좌 [책자국]
잘 정돈된 돌길을 걸어 들어가면 아담한 집이 나온다.그곳에 육지(^^)에서 온 부부가 카페 겸 책방을 하고 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취향 가득한 책들.
보기만 해도 마음이 평온해진다.
어느 날 문득 보니 집에 책이 너무 많아, 이제는 그 책들을 타인들과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방법으로 생각한 것이, 제주에서 북카페 겸 책방을 여는 것이었다고 한다.
벽면을 가득 채운 건 다름 아닌 부부의 소장용 책(중 일부).
어느 책이 누구(아내와 남편)의 책인지, 매직아이(^^)로 보면 보일지도 모른다.
힌트는 책방에 진열된 책들.
벽면의 책들이 문학과 인문이라는 큰 줄기로 정리되어 있듯, 매대의 책들도 그 큰 줄기로 나뉘어 각자의 자리에 잘 자리 잡았다.
두 분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모르는 분들이지만^^)입고할 책들을 리스트에 넣을 때, 이젠 서로가 어떤 책을 고를지 척하고 알아챌 것만 같다.
매대의 많은 책에는 봄빛 같은 노란색 책갈피가 꽂혀있는데, 최고의 페이지와 추천글을 일일이 손글씨로 작성한 [책자국]만의 정성가득한 ‘자국’이다.
그 자국(중 일부)을 만들었을 여자 책방지기가 ‘안락한(=몸이 편한) 삶보다 충만한(=마음이 차오르는) 삶을 살고 싶어, 제주에 와서 책방을 열었다’고 말해, 내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러면서 ‘인생 책’ 몇 권을 말해주었는데, 사실 ‘인생 책’이라고 해도 기억나는 건 어쩌면 한 문장 정도일 것이라며 웃었다.
“한 문장이라도 건질 수 있다면, 그게 인생책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좋아 보이는 책은 읽지 않더라도 일단 사놓아야 해요. 곧 절판될 수 있거든요.”
들으면서 나도 환희심이 나 하하 웃고 말았다.
평온하고 충만한 시간이었다.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책에 대해 이야기했던, [책자국]에서의 그때.
아직까지 여운이 많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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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보다 사랑, 소유보다 존재
예술이 우릴 구원하리라, 송당 [제주살롱]
다락방이 있는 하얀 건물로 들어서자 편백나무 숲에 온 것 같은 나무 향기가 온몸을 감쌌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문구 : 두려움보다 사랑
얼얼했다.
엔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 <깨어나십시오>에서 ‘우리에겐 오직 두 가지, 두려움과 사랑만 있다’는 내용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가르침에 의지하여 건너온 한 뭉텅이 시간이 나에게 있었다. (말하자면 너무 길어, 다음 작품 소설에서...?^^)
이곳 역시 책 판매만으론 수입이 적어 카페(와 1인 여성 한정 스테이까지)를 겸하고 있었고,책방지기의 소장용 책이 한쪽 벽면을 그야말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곳곳에 매달려 눈길을 붙잡는 세련된 메모와 가이드 글.
책으로부터, 예술로부터 배운 것들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책방지기의 마음이 들여다보인다고나 할까?
이달의 책, 올해의 책 등 높은 안목으로 큐레이션 된 책들을 보는 것만으로 책방지기가 인문과 예술에 얼마나 ‘진심’인지 느낄 수 있다.
다양한 강연과 책방 행사를 진행하며 마을의 자랑거리가 된 [제주살롱]에서 편백나무 향기와 함께 책숲의 향기를 한껏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