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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정원 Nov 22. 2024

04.에효, 퇴사도 쉽지 않네

반딧불이 반짝이는 시골 책방



눈독 들이며 헛꿈을 꿨던 빈 가게들은 이미 기획이 다 되어있고, 근처 임대료는 내 상한선의 딱 두 배.

제주에만 서점 89곳, 2023년 문 닫은 커피 전문점만 252군데.     


비빌 언덕이라곤 한적한 시골 마을의 한가한 엄마 카페뿐인 상황에, 평일에는 회사에 다니면서 주말에만 집중운영하는 서점을 카페 한 편에 열어도 좋다는 엄마의 허락을 얻어냈다.


그런데




회사일을 하며 서점 운영에 필요한 갖가지 디테일들을 챙겨나가기란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     


이렇게 한 문장으로 쓰고 보니 너무 간단해서 약간은 핑계처럼 읽히기도 하지만, 챙겨야 할 것들이 그야말로 계속 나온다.     


마침내 나는 엄마와의 약속을 깨고 퇴사할 결심을 한다.

말하지 않는 이상 엄마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리고 안다 한들 뭘 어쩔 것인가,

엄마를 무를 수도 딸을 무를 수도 없는 걸 엄마도 알고 나도 아는데, 힛.     


회사에서 맡은 업무의 지출결의와 결과보고까지 결재가 완료된 어느 오후, 나는 팀장에게 사직원을 내밀었다.

우리 부서에 온 지 4개월밖에 안 된 팀장이 당황한 얼굴로 사직원을 받아 들고 예상치도 못했다며 동분서주하더니, 한 시간쯤 후 사무국장이 나를 불렀다.     


길고 긴 옥신각신과 구구절절.


글로 쓰기도 어렵고, 쓴다 해도 읽고 싶지 않을 면담시간의 결론은......, 퇴사도 정말 쉽지 않다는 것.     

사직원은 팀장에게 파쇄되어 끝내 센터장 책상 위에 올라가지 못했다.


집에 와 신랑에게 이야기하니 반가운 목소리로 격려해 주었다.


- 여보는 정말 회사에 필요한 사람이야.

이왕 이렇게 된 거, 당분간 더 다니면서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요.

요즘 같은 일자리 보릿고개에 갑자기 월급이 끊기면, 지금 마음과는 다르게 후회할지도 모르잖아.

평일에 꼭 필요한 일은 외출이나 조퇴 쓰고, 저녁 시간과 주말에 나도 열심히 도울게요.


온 우주가 나를 회사원으로 살도록 돕고(?) 있는 게 틀림없다.

헛웃음과 함께, 내면 아주 깊숙한 곳에서 묘한 느낌이 스쳐 지나갔다.


너무 희미하게 스쳐서 자칫 놓칠 수도 있던 그 느낌이 ‘안도감’이라는 걸 깨닫자 ‘회사’에 대해 내가 품고 있는 마음이 결코 단순하지 않음이 알아졌다.     


회사는 날 밥 먹여주고, 자동차 할부 값을 내게 해 주고, 부모님께 소소한 효도를 할 수 있게 해주고, 귀여운 조카들에게 책도 사줄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곳이지만,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내 것’을 하고 싶다는 갈망이 출퇴근길에 늘 동행했었다.

회사에서 하는 일이 ‘내 것’을 하는 것이고, 내가 월급 받는 일이면 ‘내 것’이라는 걸 이론으로는 잘 알면서도, 감정적으로는 언제나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썸 타는(?) 느낌이었달까?

     

‘퇴사’까지 단 한 발자국만 남았을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가족과 동료들의 만류, 팀장과 사무국장의 회유를 관통하는 핵심이 무엇인지를.     


그것은 ‘직장인’이라는 보통의 계급에 소속되어 있다는 안도감이었다.

회사 다니기 싫다고 징징대면서 계속 회사에 다니는, 그 지겨운 반복을 거듭하는 ‘직장인’이라는 사회적 위치.

나는 그토록 ‘내 것’을 갈망하는 동시에 평범하기 그지없는 ‘직장인’에 속해있는 것을 안도하고 있던 것이다.  


깊숙한 동굴 같은 내 안에 삐죽삐죽 튀어나온 모순들을 랜턴으로 훤히 비춰 들여다본 듯 속이 시원해졌다.     


뭐야, 내 안에 꿈도 있고, 희망도 있고, 불안이도 있고, 모순이도 있네. 징징이도 있고, 다정이도 있고, 똑순이도 있고, 헛똑똑이도 있네.

에효, 그렇구나. 이게 나구나.

그러려니 하자, 다 같이 살지, 뭐.

당분간 출근을 계속하자.

그리고 책방 준비도 계속하자.

모순이가 내 동굴을 떠나고 싶을 때까지 모순이랑도 같이 사는 거지, 뭐. 떠나기 싫다면야 할 수 없고.

모순이 있으니 납득이 있고, 실망이 있으니 희망도 품어볼 수 있는 것이겠지.


문득, 나의 동굴 안에는 절대 들키기 싫은 진흙탕이 있듯이 캐어내주길 바라는 다이아몬드도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 안의 모순을 완전히 끌어안고, 걸어갈 수 있는 만큼 걸어가 보련다.

어쩌면 오늘이 책방 준비를 진짜 시작하는 날인지도 모르겠다...! 


          




처음 이 연재를 시작할 무렵, 제가 쓰고 싶던 글은 지금 같은 글이 아니었습니다.

동네에 조그마한 책방을 열기까지 어떤 시행착오와 준비 사항들이 있는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만한 ‘정보성 글’을 쓰고 싶었는데... 말이죠...



- 읽어주시는 분들 고맙습니다. 어떤 글이 될지 모르겠지만, 다음 주에 이어집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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