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운명적으로) 브런치에서 황보름 작가의 인터뷰를 본 후,닥치는 대로 ‘책, 서점, 도서관’ 관련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든 생각 : 나도 저기에 있고 싶다!
휴남동 서점에, 비 그친 오후의 헌책방에,
사라진 서점에, 섬에 있는 서점에, 말이다.
그렇게 ‘작은 책방 오픈’이라는 소박한(?) 꿈을 품고 시작한 동네 책방 투어.
주말마다 제주 곳곳의 크고 작은 서점을 돌아보고
원도심의 빈 가게나 빈집에 눈독을 들이던 어느 날.
공항과도 가깝고 원도심 내 유동인구도 많은 동네에서낡고 소담한 빈 가게 두 군데가 눈에 들어왔다.
둘 중 어디라도 책방으로 꾸며놓으면너무 안온해서 매일 ‘거기에 있고 싶을’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상상의 가지가 뻗어나가며 책방 모습이 세밀화로 그려졌다.
빈 가게이지만 ‘임대’가 안 붙어있어서사진으로 찍어놓고, 평일에 부동산에 물어보기로 했다.
상상만으로 신나는 기분이 되어 발걸음도 가볍게
그날 마지막 일정인 신랑 지인의 책방으로 갔다.
그런데......
내가 원도심의 빈 가게 사진을 보여주기도 전에말로 한 설명만으로 어딘지 알아차린 책방주인은입이 헤 벌어질 만큼 실망스러운 사실을알려주었다.
내가 눈독 들인 두 곳과 근처 건물까지 한 업체가 사서 ‘묶어 놓고’직접 운영할(또는 위탁할) 공간을 기획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근처 점포세가 내가 상한액으로 설정해 놓은 금액의 딱 두 배라는 것과작년, 재작년과도 또 다를 만큼 줄어버린 유입인구와 매출까지적나라하게 알려주고서, 책방주인은 ‘먼저 나가라고 하기 전까지는 일단 회사를 계속 다니면서 후일을 도모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었다.
아름답고무한했던 상상이, 아쉽고 유한한 현실로 돌아오는데 두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상상 속 안온했던 책방은 현실의 격랑을 맞고 침수했다.
그날 이후 나는 책방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고, 심한 무기력증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저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며,퇴근 후에 신랑과 소파에 나란히 앉아‘톡파원 25시’나 ‘세계테마기행’, ‘다시 갈 지도’ 같은 여행 프로그램 보는 것을소소한 낙으로 삼았다.
TV 화면 위로 이국의 시골 풍경과 숲길이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 와! 저런 곳에 딱 책방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신랑 입에서 무심결에 나온 말이었다.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구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신랑은 소파에 푹 파묻혀 앉아있던 몸을 화들짝 일으켜 나를 보면서, 마치 겨울코트 주머니 속 잊고 있던 지폐라도 발견한 것 같은 목소리로 반갑게 말했다.
- 여보! 우리가 현실적으로 책방을 할 수 있는 곳이 딱 한 군데 생각났어요.
이번엔 나도 입을 떼지 않을 수 없었다.
- 그게 어딘데요?
- (TV 화면을 가리키며) 저런 시골마을 숲에 우리가 아는 카페가 하나 있잖아요.
에이, 설마...
- 우리 엄마 카페 말하는 거야?
신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 시골 구석에 책방은 무슨... 카페에도 손님이 한 명이나 두 명인 데요.
신랑은 스마트폰으로 신문기사를 검색하면서
영업사원이 된 것처럼 나에게 ‘브리핑’을 시작했다.
이 작은 제주도에 서점은 독립서점 포함 89곳.
작년(2023년)에 제주에서 문 닫은 커피 전문점만 252군데.
- 여보. 이게 무슨 뜻인 것 같아요?
서점도 많고 카페는 더 많다는 뜻이잖아, 그치?
여보가 10년 후가 아닌 현시점에 책방을 오픈할 수 있는 방법은, 제주시내에 가게 임대해서 허덕이는 게 아니라, 시골 장모님 카페 한편을 빌려서 조그맣게 여는 것 같은데, 어때요?
여보는 ‘내 걸’ 하고 싶고, 카페는 리뉴얼과 홍보가 필요하니, 진정한 윈윈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안 그래도, 장모님 카페 갈 때마다너무 예쁜 카페를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안 오는 게 너무 아까웠단 말이야.
설렜다. 벅찼다.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과 망설임이 올라왔다.
- 여보. 한경면은 제주시에서 자차로 50분이나 걸려요.내가 매일 왕복할 수 있을까? 손님들이 거기까지 와줄까?
신랑은 약간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인자한 할머니 같은 말투로 나에게 말했다.
- 여보가 서울 살 때는 지하철로 1시간씩, 출퇴근만 왕복 2시간 넘게 했었다면서요?
그리고 위치가 어디든 ‘거기에 있고 싶다면’ 손님들은 오겠죠.여보가, 우리가, 그런 공간을 만들어야죠.
그 주의 주말은 책방 투어가 아닌 엄마의 카페로 찾아갔다.
나의 계획을 친정 가족들과 공유하고 엄마의 허락을 구했다.
시골 카페라 SNS 홍보는 필수이건만 엄마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기에,한편에 책방을 겸하는 계획에는 일단 긍정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회사를 바로 그만두는 것은 절대 반대라고 했다.
우린 타협점을 찾았다.
카페 한편에 책방을 열되, 주말에 집중운영하는 방식으로 시작해 보기로.
이렇게 비로소 한 발자국을 내딛는다.
준비할 게 많다.
잔걱정이 줄었고 계획이 늘었다.
침수됐던 상상의 책방을 건져 올려 시골 숲 앞에 내려놓는다.
‘서점 89곳, 문 닫은 카페만 252군데’라는 현실의 격랑 위에서우리는 균형을 잡고 파도타기를 잘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