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정원 Sep 29. 2024

옆구리에 아카시아가 자란다 05

알고보면 흔한 일??!!


나는 눈치 보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한껏 정색하고 운을 뗐다.



- 진우야. 이제부턴 정말 진지한데. 너가 나를 미쳤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이해해.

하지만 정말 다 사실이야, 헛소리가 아니라.

내 왼쪽 옆구리에서 식물이 자라나고 있어.

품종, 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그건 모르겠고 이파리가 연두색이고, 아참, 식물의 이파리는 다 연두색 계열이지.

아무튼, 그 아이 이름이 아카시아야.

이파리가 너무 똑같아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어.

내 옆구리에 생존환경이 괜찮은지, 4개월 넘게 쑥쑥 잘 자라서 이제 거의 무릎에 닿을락 말락 해.



침통한 표정으로 잔뜩 늘어놓은 내 얘기를 들은 진우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무심히 말했다.


- 보여줘.


- 야, 옷 위에 이만큼 올려야 보이는데 여기서 어떻게 보여주냐?


- 병원에 와서 환자복 갈아입고 누워있어. 얼굴 안 보고 몸만 볼게.


- 간호원 없이 너만 볼 수 있나?


- 진료시간 지나서 와.



다음 날 저녁 퇴근 후에 진우가 근무하는 한의원으로 갔다.

보정속옷을 벗자 구겨져 있던 아카시아의 잎들이 활짝 펴졌다.  환복하고 진료실 침대에 누워있으니 진우가 들어왔다.

나는 진우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썬글라스를 꼈다.


진우가 윗옷을 들춰 한참 내려다보더니 “옷 갈아입어. 나가자.” 라고 했다.

옷을 갈아입고 나가니 접수대 앞에 진우가 서 있었다.


- 야, 진찰은 했냐? 결과도 말 안 해주고.


- 아까 그렇게 하고 들을래? 쯧, 가서 맥주나 먹자.



10년 전부터 우린 암묵적으로 단둘이서는 술을 먹지 않고 있었다.

둘이 술을 마시면 늘 어느 시점에 이르러 ‘수인이’ 이름이 나왔다.  그러면 점차 표정과 말이 사라지고, 그러다 둘 중 하나가 울었다.

그러던 언젠가 우리는 울고불고하면서 서로 껴안다시피 기대고 있다가 키스를 할뻔한 적이 한 번 있었다.


동네 맥주집에 도착한 우리는 호가든과 나초를 주문하고, 마주앉았다. 진우에게 물었다.


- 나 심각해?



진우는 동문서답도 아닌 동문서문을 했다.


- 아프진 않아?



우린 자연스럽게 ‘아카시아’에 대해 대화를 이어나갔다.


- 전혀. 잎이 막 날 땐 좀 가렵고 엄청 피곤하고 그랬는데, 그러고나서부턴 멀쩡해.


- 수인이 아직도 보고 싶어?


- 몰라. 보고 싶은지 아닌지 모르겠어. 그냥 있었던 일들이 자꾸 생각나. 어제일처럼.


- 그게 보고 싶은 거지. ‘독후감’은?


- 매력종합세트지. 특히 글 쓴 거랑 목소리.


- 근데 왜 망설여? 사귀자는 것도 아니고 데이트 한 번 하자는데.


- 보고도 몰라? 아카시아 때문이지.


- 아카시아가 왜? 첫날부터 같이 자게?! 빛의 속도 보소...!


- ! 쯧, 그런 거 아니거든!


- 쳇! 데이트 한 번 하자는데 앞서 나가긴…… 대체 뭐가 두려워?



나는 뭔가 억울해지는 마음으로 지나치게 항변하고 있었다.


- 두려워. 너 같으면 옆구리에서 식물 자라는 여자랑 사귀겠냐?

솔직히 나도 내 몸에서 자라니까 억지로 이해하는 거지, 누가 그렇다고 하면 난 일단 피하고 볼 거야.

나한테나 아카시아지, 다른 사람들한텐 그냥 ‘풀’ 아냐.  그런 게 사람 몸에서 나온다는데, 4차원도 모자라서 외계인 취급 받을걸?



나는 우는소리를 하고 진우는 희미하게 웃는 듯 마는 듯했다.

진찰 결과나 말하라고 괜히 윽박지르자 진우는 차분한 목소리로 ‘없어지길 바라느냐’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 흠. 너야말로 안 믿을지 몰라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진우는 남은 맥주를 다 들이켜고 다시 맥주를 주문했다. 그리곤 말했다.


- 나도 왼쪽 옆구리에 허브가 자란 적이 있어.



나는 잠시 ‘일시정지’된 채 진우를 바라보다가, 문득 ‘재생’되었다.


- 보여줘.


- 이것 봐요, 디테일 누나. ‘자라고 있다’가 아니고 ‘자란 적이 있다’고요.


- 언제?


- 한 15년쯤 전에.


- 우와! 너 되게 어릴 때네.


- 넌 안 어렸니?


- 나돈데, 넌 더…… 너 정말 놀랐겠다.


- 놀랐지.


- 힘들었겠다.


- 힘들었지.


- 왜 말 안 했어?


- 너 같으면 했겠냐? 지금처럼 친할 때도 아니었고.


- 없어졌어?


- 없어졌어.


- 언제?



진우는 말없이 맥주를 들이켜고 웃지도 않으면서 입꼬리만 쭉 끌어올리는 특유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에게도 희망이 있다며 기뻐하자 진우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순간 진우의 얼굴이 아주 잠깐 그림자처럼 보였다.


무언가 막연히 구원받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의 대화를 아카시아가 다 듣고 있을 것이 걱정되긴 했지만, 오랜만에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적어도 그때까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