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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정원 Sep 30. 2024

옆구리에 아카시아가 자란다 06

달 밝은 밤의 3중창 BGM


토요일에 나는 서울숲에 가지 않았다.

얇은 이불에 감싸여 옆으로 누운 채로 눈앞에 놓인 아카시아의 이파리에 얼굴을 기대고 있었다.

창밖에서 햇살이 내 몸과 아카시아를 사선으로 나누며 파고들었다.

아카시아를 들어 얼굴 위에 올려놓았다. 그늘이 생기며 햇살을 가려주었다.



아카시(아카시아의 애칭)야, 수인이는 좋은 곳에 있을까? 자기 이름을 아직 기억하고 있을까?

내가 아카시아 핀 그 길을 기억하고, 같이 걸었었던 그 시간들을 기억하고, 자기를 기억하는 것처럼 그 애도 나를 기억할까?

…… 너도 수인이 보고 싶지? 다시 한번 손잡고 나란히 걷고 싶다.

…… 다시 한번 얼굴을 손으로 만져보고 싶어.



아카시아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내가 흘린 눈물 때문이었을까?

이날 저녁, 처음으로 아카시아의 이파리 중 하나가 시들었다.     




*




추석엔 혼자 타이베이에 여행을 가려고 티켓을 끊었는데, 현지 태풍으로 이틀 연속 결항이 되었다.

그렇지만 날씨는 변할 수도 있고 비행기는 뜰 수도 있다고 억지를 부려 연휴 시작일에 기어이 인천공항으로 갔다.

커피와 맥주를 번갈아 마셨고, 1청사와 2청사를 괜히 오갔고, 24시간 라운지에서 밤새워 책을 읽었다.

추석 당일 거의 오밤중이 되어서야 사실상 데코였던 캐리어를 끌고 본가로 갔다.


계획대로 작은집 가족과 막냇삼촌 가족은 ‘철수’한 후였다.

우리 3남매 중 유일하게 결혼으로 효도한 막냇동생 가족도 저녁 무렵 처가로 이동했다고 했다.

부모님과 본가 거주자인 남동생 유성이, 그리고 이웃집에 사는 고모와 고모 딸 미정이 있었다.

현관문을 열면서 나는 말했다.


- 우리 이제 빨리 시작하자!


베란다쪽에서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안 그래도 미정이랑 유성이가 새로 상 차리고 있어. 너, 밥도 먹을 거니?


나는 “아니!” 라고 외치고 손을 씻고 나왔다.

여섯 명이 둘러앉아 명절 음식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셨다. 모두 이미 한 차례 마신 후라 화제의 중심인물은 내가 되었다.


아빠가 결혼 안 한다고 ‘갈구기’ 시작하자, 엄마랑 고모가 가세했다.

얼굴도 반반하고 직업도 변변한데 만나는 사람이 없다고, 5년째 반복되는 3중창 노래의 1절이 시작되었다.

정도는 BGM(배경음악)으로 들어줄 수 있기에, 나는 접시째 잡채를 호로록거리며 능청스럽게 웃기만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올해의 복병이 미정이 될 줄은 몰랐다.

발단은 아빠의 “끝까지 살 생각 안 해도 돼. 일단 갔다가 와도 좋으니까.”라는 말이었다.


- 아빠, 너무하네. 왜 그런 말을 해요.


- 너 애기도 좋아하는데, 여자는 그 나이 지나면 힘들어지니까 그러지.


- 아빠 말이 맞아. 조카만 예뻐할 게 아니고 자기 자식을 품에 안아봐야지.


- 오빠랑 언니 말이 맞아. 조카는 조카고 자기 아기가 있어야지.



핵심을 파악한 나는 기다렸다는 듯 준비해 둔 멘트를 읊었다.


- 오호! 아기가 핵심이었어? 아기는 내가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시도할 수 있어.

애 아빠가 누군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내가 혼자 키우는 것에도 동의하면, 용기를 내볼게요.

모두 동의하세요?



어른 3중창 BGM은 버퍼링 중이고, 나는 태연하게 맥주를 들이켠 후 동그랑땡을 집어 먹었다.

유성은 “누나, 리스펙!”이라고 중얼거리며 맥주잔을 부딪혀 주었다.


그때 미정이 말했다.


- 언니, 이왕 그런 생각이차라리 잘 묻고 잘 따져서, 진우랑 잘해보는 건 어때?



참고로 미정, 유성, 진우는 지금은 따로 만나는 사이까진 아니지만 소싯적 동네 친구이자 초등학교 동창들이다.


어른 3중창이 헛된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연하에, 한의사에, 인물에, 더할 나위 없는 아이라고, 왜 이제까지 그 생각을 못했지, 라며 결혼 날짜라도 잡은 듯 흥분했다.

나는 흔들림 없는 평온한 표정으로 찬물을 쫙 끼얹었다.


- 진우는 안 되니까 모두들 진정하세요.


- 진우는 왜 안돼? 안 되면서 왜 주야장천 붙어 다녀?


- 엄마는...참. 주야장천 붙어 다니긴! 어쩌다 한 번씩 얼굴이나 보는 거지.


- 아무튼 진우면 대찬성인데, 왜 안 되냐고?



옥신각신하는 사이로 미정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 언니, 혹시…… 에잇, 아니다!


- 아니긴 뭐가 아니야, 미정아 뭐야, 어서 얘기해봐라.



고모가 닦달하자, 미정은 난처한 표정으로 얼버무리듯 넘어가려다 옹알이하듯 입을 뗐다.


- 아니, 나는 혹시 언니가 아직, 수이..인이……



수인의 이름이 나오자 모두 일제히 내 눈치를 보며 조용해졌다.

맥주를 두 모금쯤 마시고 고모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려는 말투로, 그러나 매우 어색하게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 맞다! 진우는 유정이 대학교 때부터야 알았지? 원래 동갑이 아니라. 호호호.

유정이 삼수해서 걔들이랑 동기고. 음음.

수이…인이 하고는, 같은 과였나?



유성이 대답했다.


- 셋 다 다른 과예요. 누나랑 걔네들 독서 동아리에서 만났잖아요.



고모가 받았다.


- 그래, 기억난다. 유정이랑 수이인…이 사귈 때도, 진우랑도 다 같이 만나고 그랬잖아.

언니, 사윗감으로 아깝긴 하지만, 진우는 좀 그러네요.



엄마가 발끈했다.


- 그렇긴 뭐가 그래요? 어느 철 없던 시절 일인데! 진우는 그동안 연애도 하고 그랬을걸?

이게 대체 몇 년이야. 수인이 그렇……, 암튼!

우리 유정이는 마음 약해서 이 세월 동안 제대로 된 연애도 한번 안 하고 얌전히 나이만 먹었다구요.



유성이 사족을 남겼다.


- 누나가 얌전히? 술을 그렇게 퍼마셨는데?



엄마와 난 유성을 흘겨봤다.

고모가 말을 이었다.


- 그래도 진우 볼 때마다 유정이가 수인이 생각도 나고 그럴 거 아녜요. 진우도 유정이 볼 때마다 수이



드디어 나다.


- 그만들 좀 하세요! 하여튼 내 인생에 나보다 더 관심 많고 내 마음을 나보다 더 잘 안다니까.

그렇게 잘 알면 다 같이 모인 김에 달님한테 기도라도 하세요. 내 소원 좀 들어달라고.

내 소원은, 다시는 이런 말 안 듣는 거야. 나 간다!



반찬 가져가라는 엄마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문을 닫았다.

본가에서 내가 사는 집까지는 두 정거장 밖에 안 되지만 시간이 늦어서 카카오 택시를 불렀다.


집으로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고 정리할 것도 없는 캐리어를 정리하고 반신욕을 했다.

조명을 낮추고 FM4U 심야방송을 켰다.

맥주잔에 얼음을 가득 넣어 상온의 참이슬을 콸콸 부었다.


라디오에서 Ephemera의 Girls keep secrets in the strangest ways가 나오고 있었다.

아카시야, 소녀들은 비밀을 이상한 방법으로 간직하고 있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나서 얼음을 넣은 소주를 꿀꺽, 꿀꺽, 크게 두 모금 마셨다.

가슴 한가운데로 차가운 것이 지나가며 배에 도착했을 땐 뜨겁게 바뀌어 있었다.

생각은 자꾸만 더 또렷해졌다.


사실은 모두 수인이를 기억하고 있던 거다.

나를 보면 여전히 수인이까지 생각이 나는 것이다.

마치 수인이가 내 일부인 것처럼 말이다.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면서, 엄밀히는 나라고 할 수 없지만 지금은 나의 일부인 아카시아에게 말했다.


달님이 다른 나라로 가버리기 전에, 우리 소원을 빌자. 아카시야, 넌 소원이 뭐니?

너의 소원을 먼저 들어달라고 내가 기도할게.



이날 밤, 두 번째로 아카시아 잎이 시들었다.







Ephemera - Girls keep secrets in the strangest ways


https://youtu.be/LUhjiARqh8E?si=LBJ8pV7bwmFIA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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