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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정원 Oct 01. 2024

옆구리에 아카시아가 자란다 07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주지스님


어느새 가을과 겨울 사이.

아카시아의 줄기는 그대로, 잎은 이제 열 장이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이후, 독서 세미나 모임은 그만두었다.

11월 첫째 주 토요일, 오랜만에 절에 가서 주지스님께 차를 청했다.


- 스님, 기억이라는 건 뭘까요?


- 유정아, 니 또 시작이가? 한동안 잠잠하더니. 차 빨리 마시고 가거라.



나는 음절을 딱딱 끊으면서 대답했다.


- 네, 네. 궁금해하는 중생을 가엾이 여겨 주·지·도 않는, 우리 주·지·스·님. 알···요.

빨리 마시고 갈게요. 앗, 뜨거!


- 하하. 니 많이 한가한 것 같으니까, 대웅전 뒤뜰에 낙엽 좀 쓸어놓고 가거라.


- 낙엽이요? 스님...! 잎은 왜 났다가 왜 떨어지는 걸까요?



스님은 장난스레 대답했다.


- 유정이 슬프라고 일부러 그러는 것 같은데?


- 치..., 말도 안돼.


- 와 말이 안 되노?


- 잎이 왜요? 굳이.


- 그러니까 말이다. 모르는 줄 알았더만 잘 아네?



스님은 내 앞에 놓인 빈 잔에 차를 따라주면서 말을 이었다.


- 소중히 피운 잎을, 굳이 다른 존재를 슬프게 하기 위해 떨어뜨리는 그런 엉터리같은 나무가 세상에 어데 노? 응? 만큼 니 질문이 엉터리다, 이 말이다.

왜 났다가 왜 떨어지냐고?

 모습대 살아낼락하 그런 기다. 알겠나?



나는 한동안 말없이 차를 마셨다. 주지스님이 다시 한 번 찻물을 다호에 붇고 있을 때, 나는 물었다.


- 스님, 사람은 나무가 될 수 있을까요?


- 사람은 나무뿐만 아니라 뭐든지 될 수 있다.


- 그럼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어요?


- 누가 되고 싶은데?


- 음…… 수인이요.


- 흠…… 수인이. 가가 와 되고 싶노?


- 그곳은 어떤지, 잘 있는지, 나를 기억하는지 그런 게 궁금해요.


- 와?


- 잊혀지는 게 두려워서요.


- 흠…… 유정이가 드디어 잊어가나 보네?



순간 흠칫했다.

나는 내가 잊혀지는 게 두렵다고 했는데, 스님은 나더러 잊어가나 보다고 말했다.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런 기분이 들었다.

주지스님이 말을 이어갔다.


- 니가 궁금한 건 내가 확실히 말해줄 수 있다.

말해주는 대신, 뒤뜰로는 안 되고 공양간 앞마당까지 전부 쓸어놓고 가야된데이.

흐음. 수인이는, 수인이가 아닌 곳에서 잘 먹고 잘살고 있고, 거긴 여기만큼 좋고, 유정이를 기억하고 있다.



나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물었다.


- 이제 수인이가 아닌데 유정이를 기억할까요?



궁금해하는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듯, 스님은 웃음기 없이 차분히 답했다.


- 오늘의 나는 이미 어제의 내가 아니지만 아직 기억 속에 남아있는 어제가 있겠지?

수인이에겐 그게 유정이일 거라고, 스님은 그래 생각한다.

 


나는 울먹였다.


- 사실은 스님도 잘 모르면서 그냥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저 울리려고……



스님은 본래 목소리로 돌아와 꾸중인듯 장난인듯 답했다.


- 니 맘대로 생각하거라, 니 마음이니까.

난 내 맘대로 말할게, 내 마음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서비스! 내 한 마디 해줄께.

이제 잊어가는 걸 받아들이라.

억지로 기억을 붙잡지 않아도 된다.

니 아까 낙엽 물었지?

떨어지는 잎 하나가 아까워서 전전긍긍하는 나무 봤나?

잎이 떨어지는 건 땅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다.

땅으로 돌아가면 새로 피어날 잎을, 내 좋다고 억지로 책갈피에 천년 만년 붙잡고 있을끼가?

우리에겐 마음이 있다아이가?

허공처럼 넓은 이 마음 속에는 이파리 하나가 아니라 숲 전체를 그대로 다 품어무한하다.




나는 공양간 앞마당과 대웅전 뒤뜰에 눈물을 뿌리며 낙엽을 쓸었다.

뒤뜰을 쓸다가 유난히 예쁜 낙엽이 보여서 쓸지 않고 주웠다. 대추나무 잎이었다.

하늘에 대고 잎을 바라보니 이파리의 핏줄이 선명히 보이며, 나와 그 한 잎이 매우 각별한 사이처럼 느껴졌다.

그 한 잎을 핸드폰과 핸드폰 캐이스 사이에 끼워 넣고서, 천년 만년 간직할 것처럼 집으로 돌아왔다.



아카시야, 오늘 낙엽을 하나 데려왔는데, 보여줄게. 엄청 이쁘지?

이 낙엽은 왠지 다음 생에 분홍색 꽃으로 태어날 것 같애(*10화 작가노트 참고).

내 마음이니까 내 마음대로 생각하는 거야. 히힛.



이날 밤 세 번째로 아카시아 잎 하나가 또 시들었다.

시들어 떨어져 버린 이파리를 빈 종이상자 안에 넣었다.

앞서 떨어진 두 개의 잎도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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