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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정원 Oct 02. 2024

옆구리에 아카시아가 자란다 08

진우의 고백


그 후로도 문득문득 아카시아 이파리가 하나씩 시들어, 아침이면 이불 위에 얌전히 떨어져 있곤 했다.

진우에게 물었더니 답장이 왔다.

 

[ 시작됐구나 ]


두려운 마음이 벌컥 올라왔다. 심장이 뛰었다.

줄기는 그대로인데, 잎은 나온 순서대로 하나씩 떨어졌다.


연초에 주지스님이 찻잎을 포장해서 담아줬던 종이상자에 그 이파리들을 모아 놓았다.

상자를 내려다보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열 손가락의 손톱을 모조리 다 물어뜯은 후였다. 손끝이 아렸다.


몸에서 식물이 자라지 않는 평범한 사람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미세하게 떨렸다.

두꺼운 옷을 입는 계절이라 보정속옷 속에 아카시아를 구겨 넣을 필요도 없는데, 상자에 잎이 쌓여갔다.

넷, 여섯, 아홉, 열……     


심장이 쿵쾅거리며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내 삶에서 수인이가 없어졌을 때처럼 울렁거렸다.



12월 셋째 주 토요일 아침, 남은 잎은 한 장이었다.


오전에 연락했을 때, 진우는 오후 다섯 시까지 진료가 있다고 했다.

오후 다섯 이십 분에 진우에게 또 전화를 했다.

진우는 아직 병원에 있었다.

삼십 분 후 내가 병원 현관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을 때, 진우는 아직 가운을 입은 채로 접수대 앞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우 얼굴을 보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


- 진우야… 아카시아… 이제 줄기만 남았어… 아침까지도 하나… 남아있었는데……



울먹이는 내 왼쪽 팔을 천천히 당겨 진우가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두 팔을 진우 목에 감고 거의 매달려서는 엉엉 울었다.

잠시 후 진우는 두 손바닥으로 내 양쪽 볼의 눈물을 슥슥 닦아주고 나서, 내가 두꺼운 모직 코트를 벗는 걸 도와주었다.


- 유정아. 이렇게까지  안을줄 알았으면, 미리 코트 먼저 받아줄 걸 그랬잖어.



나는 눈물범벅인 얼굴로 풉, 하고 웃고 나서 다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진우는 내 코트를 접수대 위에 걸쳐놓고서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 자, 아까처럼.



 흘길 힘도 없어서 실없는 미소가 지어졌다.

진우는 내 표정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정수기에서 물을 갖다 주었다.

잠시 후 우린 진료실 침대 위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 너, 우리 누나 모르지?


- 있었다는 건 알아.



내가 모르는 진우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우리 누나 고3 졸업하고 딱 스무 살 됐을 때, 나 4학년이었거든.

4학년, 생각해봐. 엄청 꼬마잖아.

근데, 어느 날 갑자기 누나가 대학교를 안 가고 수녀원이라는 곳에 들어간다는 거야.

수능시험도 다 보고 입학할 학교도 결정했는데 말이야.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다 난리 나고, 난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엄청 짜증이 나면서 무지 슬픈 거야.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동생이라고 날 정말 많이 챙겨주고 예뻐했는데.

그동안 아무런, 정말 아무런 내색조차 없다가 말이야.


그거 알어? 누나가 수녀가 되겠다고 집을 나가는데, 부엌에선 엄마 우는 소리가 작게 들리고, 난 그런 느낌을 받았어.

내가 버려지는 느낌... 말이야.


마지막에 현관에서 나를 꽉 끌어안는데, 그거 알아?

너무 좋은데 너무 슬픈 거.

너무 좋은데 너무 미운 거.

너무 슬프니까 너무 화가 나고, 너무 화가 나니까 내가 너무 미운 거.

누나한테는 화가 안 나는데 눈물이 터진 나한테는 너무 화가 나는 거, 말이야.


중에, 몇 년쯤 후에 생각하니, 사실 누나한테 화가 안 난 게 아니라, 누나한테 너무 화가 나는데 누나를 너무 좋아하니까, 누나 대신 차라리 나 자신을 미워한 것 같았어.


음... 아무튼, 시간이 흘러서 대학생이 되고, 너랑 수인이랑 독서클럽에서 만났잖아.

그때 5월 중순이었나?

너네 만나려고 우리 늘 가던 커피숍에 딱 들어섰는데, 너랑 수인이가 오른쪽 구석 자리에 평소처럼 마주 앉아 있지 않고 나란히 앉아서, 너가 낮은 목소리로 살금살금 수인이한테 책을 읽어주고 있더라고.

순간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더라.

우리 누나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어렸을 때 누나가 나를 옆에 앉혀놓고 책 읽어주던 장면이 순식간에 떠오르잖아.

갑자기 커피숍 안빙글빙글 회전하더라.


그날부터 누나 생각이 불쑥불쑥 떠오르더니, 왼쪽 옆구리에서 허브가 자라기 시작했어.

나의 경우, 그 허브는 우리 누나가 키우던 민트를 꼭 닮았더라고.

, 난 이름은 지어주지 않았어. 대화도 안 했고.

난 너만큼 4차원은 아니니까. 아얏, 알았어. 취소, 취소. 

그래도 너가 겪은 감정들, 나도 비슷하게 겪지 않았겠냐?


그러고 '원리'라고 해야하나? '공식'이라고 해야하나.

암튼, 누나를 많이 생각하고 많이 보고싶어한 날은 잎이 더 빨리 자라는 걸 발견했어.

막 일부러 생각하거나 생각을 멈추려고 노력하면서, 실험 비슷한 것까지 해봤다니깐?

흠, 대견하지?


그러다 언제부턴가 잎이 하나씩 떨어지는데 기쁘면서도 슬프고, 안심되면서도 서운하더라.

마지막 잎까지 다 떨어진 날은..., 조금 오버라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다시 한번 버려지는 기분마저 들었어.

그리고 다음 해에 잎이 새로 날 수도 있다는 기대를 허물면서, 얼마 후에 줄기까지 몸에서 떨어져 나갔지.

지금은 옆구리 작은 자국만 남아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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