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구리에 아카시아가 자란다 07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주지스님
어느새 가을과 겨울 사이.
아카시아의 줄기는 그대로, 잎은 이제 열 장이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이후, 독서 세미나 모임은 그만두었다.
11월 첫째 주 토요일, 오랜만에 절에 가서 주지스님께 차를 청했다.
- 스님, 기억이라는 건 뭘까요?
- 유정아, 니 또 시작이가? 한동안 잠잠하더니. 차 빨리 마시고 가거라.
나는 음절을 딱딱 끊으면서 대답했다.
- 네, 네. 궁금해하는 중생을 가엾이 여겨 주·지·도 않는, 우리 주·지·스·님. 알·겠·어·요.
빨리 마시고 갈게요. 앗, 뜨거!
- 하하. 니 많이 한가한 것 같으니까, 대웅전 뒤뜰에 낙엽 좀 쓸어놓고 가거라.
- 낙엽이요? 스님...! 잎은 왜 났다가 왜 떨어지는 걸까요?
스님은 장난스레 대답했다.
- 유정이 슬프라고 일부러 그러는 것 같은데?
- 치..., 말도 안돼.
- 와 말이 안 되노?
- 잎이 왜요? 굳이.
- 그러니까 말이다. 모르는 줄 알았더만 잘 아네?
스님은 내 앞에 놓인 빈 잔에 차를 따라주면서 말을 이었다.
- 소중히 피운 잎을, 굳이 다른 존재를 슬프게 하기 위해 떨어뜨리는 그런 엉터리같은 나무가 세상에 어데 있노? 응? 그만큼 니 질문이 엉터리다, 이 말이다.
왜 났다가 왜 떨어지냐고?
다 지 모습대로 살아낼락하이 그런 기다. 알겠나?
나는 한동안 말없이 차를 마셨다. 주지스님이 다시 한 번 찻물을 다호에 붇고 있을 때, 나는 물었다.
- 스님, 사람은 나무가 될 수 있을까요?
- 사람은 나무뿐만 아니라 뭐든지 될 수 있다.
- 그럼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어요?
- 누가 되고 싶은데?
- 음…… 수인이요.
- 흠…… 수인이. 가가 와 되고 싶노?
- 그곳은 어떤지, 잘 있는지, 나를 기억하는지 그런 게 궁금해요.
- 와?
- 잊혀지는 게 두려워서요.
- 흠…… 유정이가 드디어 잊어가나 보네?
순간 흠칫했다.
나는 내가 잊혀지는 게 두렵다고 말했는데, 스님은 나더러 잊어가나 보다고 말했다.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런 기분이 들었다.
주지스님이 말을 이어갔다.
- 니가 궁금한 건 내가 확실히 말해줄 수 있다.
말해주는 대신, 뒤뜰로는 안 되고 공양간 앞마당까지 전부 쓸어놓고 가야된데이.
흐음. 수인이는, 수인이가 아닌 곳에서 잘 먹고 잘살고 있고, 거긴 여기만큼 좋고, 유정이를 기억하고 있다.
나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물었다.
- 이제 수인이가 아닌데 유정이를 기억할까요?
궁금해하는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듯, 스님은 웃음기 없이 차분히 답했다.
- 오늘의 나는 이미 어제의 내가 아니지만 아직 기억 속에 남아있는 어제가 있겠지?
수인이에겐 그게 유정이일 거라고, 스님은 그래 생각한다.
나는 울먹였다.
- 사실은 스님도 잘 모르면서 그냥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저 울리려고……
스님은 본래 목소리로 돌아와 꾸중인듯 장난인듯 답했다.
- 니 맘대로 생각하거라, 니 마음이니까.
난 내 맘대로 말할게, 내 마음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서비스! 내 한 마디 해줄께.
이제 잊어가는 걸 받아들이라.
억지로 기억을 붙잡지 않아도 된다.
니 아까 낙엽 물었지?
떨어지는 잎 하나가 아까워서 전전긍긍하는 나무 봤나?
잎이 떨어지는 건 땅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다.
땅으로 돌아가면 새로 피어날 잎을, 내 좋다고 억지로 책갈피에 천년 만년 붙잡고 있을끼가?
우리에겐 마음이 있다아이가?
허공처럼 넓은 이 마음 속에는 이파리 하나가 아니라 숲 전체를 그대로 다 품어도 무한하다.
나는 공양간 앞마당과 대웅전 뒤뜰에 눈물을 뿌리며 낙엽을 쓸었다.
뒤뜰을 쓸다가 유난히 예쁜 낙엽이 보여서 쓸지 않고 주웠다. 대추나무 잎이었다.
하늘에 대고 잎을 바라보니 이파리의 핏줄이 선명히 보이며, 나와 그 한 잎이 매우 각별한 사이처럼 느껴졌다.
그 한 잎을 핸드폰과 핸드폰 캐이스 사이에 끼워 넣고서, 천년 만년 간직할 것처럼 집으로 돌아왔다.
아카시야, 오늘 낙엽을 하나 데려왔는데, 보여줄게. 엄청 이쁘지?
이 낙엽은 왠지 다음 생에 분홍색 꽃으로 태어날 것 같애(*10화 작가노트 참고).
내 마음이니까 내 마음대로 생각하는 거야. 히힛.
이날 밤 세 번째로 아카시아 잎 하나가 또 시들었다.
시들어 떨어져 버린 이파리를 빈 종이상자 안에 넣었다.
앞서 떨어진 두 개의 잎도 그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