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정원 Sep 28. 2024

옆구리에 아카시아가 자란다 04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와 '독후감'



독서 세미나가 있는 날이다.

한 달 만에 ‘독후감’을 보는 날. 그가 쓴 감상평을 그의 목소리로 듣는 날.


오늘의 책은 이번 시즌 난제로 거론됐던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이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스커트를 입어서 아카시아가 삐져나올 걱정은 없었다.

그런데도 마음이 두근거렸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독후감’과 살짝 사선으로 마주 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차례대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자기가 쓴 감상문을 조금 또는 전부 읽고 거기에 이야기를 덧붙이거나 모두를 향해 질문을 던지곤 한다.


“이번엔 신지형님 이야기 들어볼게요.” 라고 진행자가 말했다.

‘독후감’의 중저음 목소리가 시작되었다.



기억을 잃어버린 주인공 기 롤랑은 자기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과거로 거슬러 가며 이리저리 떠다닙니다.

그를 따라가다 보면 마치 소설 전체가 안개 속에 있는 듯한 느낌으로, 기억의 상실을 시각화한다면 그런 이미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 자신이 ‘프레디’인 줄 알았을 때는 ‘프레디’다운 기억들이 떠오르고, 자신이 ‘페드로’일지 모르는 증거들이 발견되자 ‘페드로’다운 기억들이 생겨납니다. 그게 흥미로웠어요.

……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점은, 화자가 일련의 일들을 겪은 후 기억을 잃을 때까지 살아온 10여 년 동안의 이야기가 공백이라는 점입니다.

그동안에도 어떤 일들이 있었을 것이고 삶은 이어져 왔건만, 화자는 그 세월에 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 이 작품의 첫 문단은 매우 유명하고 서글퍼지도록 아름답지만, 저를 더욱 사로잡은 것은 첫 문단이 아닌 마지막 단락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녀는 벌써 길모퉁이를 돌아갔다. 그런데 우리의 삶 또한 그 어린아이의 슬픔과 마찬가지로 저녁 속으로 빨리 지워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테이블에 앉은 순서대로 차례가 돌아가 얼마 후 내 발언 시간이 되었다.




저는 이 이야기를, 기억을 잃어버린 한 사람이 기억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아닌, 아무런 설명 없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 즉 우리가, 근원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여정이라고 읽었습니다.

그를 따라가면서, 마치 전생의 나를 찾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 내가 ‘프레디’인 줄 알았을 때에는 ‘게이 오를로프’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내가 ‘프레디’가 아니라 ‘페드로’라는 신념이 생기자 ‘드니즈’라는 사람이 나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됩니다.

의미라는 건 어쩌면, 그 시절의 내가 누구인지 대답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점은, 화자가 ‘드니즈’를 잃은 후 12년의 세월을 아무런 설명 없이 공백으로 남겨놓았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마치 소중한 이를 잃고도 꾸역꾸역 살아낸 모든 시간들, 그 위에 담담히 놓여있는 생(生)의 위로처럼 느껴졌습니다.

…… 이 작품의 마지막 단락은 울컥합니다. 그러나 제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역시 첫 단락입니다.

그것은 마치, 지난 생과 지지난 생 그리고 이번 생의 나를 닮았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



세미나를 마치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나자, 여느 때처럼 뒤풀이를 가는 사람들과 가지 않는 사람들로 나누어졌다.

나는 지하철을 탈까 버스를 탈까를 마음속으로 아카시아에게 물어보면서, 역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 유정님!



중저음 목소리에 돌아보니 ‘독후감’이었다. 나는 방긋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 뒤풀이 안 가셨어요?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곁으로 다가와 걸으며 물었다.


- 어느 방향이세요?


- 성수동 방향이에요, 지형님은요?


- 저는 마포쪽이요. 우린 반대 방향이네요?


- 네, 우린 반대 방향이네요?



침묵의 틈새로 나와 ‘독후감’의 구두 발자국 소리가 나란히 들렸다.


- 저, 유정님. 성수동 쪽이면 혹시 서울숲 자주 가세요? 시간 괜찮으시면 주말에 그쪽에서 커피라도 마실까요? 같이.



그의 제안에 나는 너무 환하게 웃은 것만 같았다.



*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에서 진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언제나 그랬듯 진우와 난 별다른 화해 절차가 없다.


[ 어디? ]

[ 집 ]

[ 20분 있어? ]

[ 19분은 있어. ]


누가 됐건 1분을 줄여 말하는 게 우리만의 농담이다.

진우 집과 내 집 중간에 있는 편의점 야외 테이블에서 우린 만났다.

나는 ‘독후감’이 데이트 신청한 이야기를 진우에게 했다.


- 근데, 그러자는 대답이 선뜻 안 나오더라. 그냥 나중에 보자고, 얼버무리고 말았어.


- 왜, 12년째 수인이 집착중이라?


- 으이구, 그게 아니라…… 잘은 모르겠는데, ‘독후감’도 나 좋아하게 될 것 같아서.


- 너 좋아하면 좋은 거지 걱정은 뭔 걱정? 수인이가 그렇게……



나는 진우의 말을 끊었다.


- 수인이가 아니라, 아카시아 때문에……


- 뭐라고? 안 들렸어.


- 아카시아……


- 아카시아?!?!



그렇게 ‘아카시아’는 나 외의 사람에게도 존재를 알리게 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