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구리에 아카시아가 자란다 03
같은 동네 사는 흔한 남사친
9월 초가 되자 아카시아는 허리에 한 바퀴 둘러도 될 만큼 줄기가 길어졌다.
이파리는 어느새 열두 장.
블라우스 위에 자켓을 입는 계절이 다가온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줄기를 몸통에 두르지 않고 그대로 늘어뜨려 보았다. 무릎 바로 위까지 내려왔다.
늘어뜨린 채 보정속옷과 블라우스, 스커트를 입어봤다. 위에 자켓을 걸치니 표 안 나게 한 계절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흠..., 하고 한숨을 내쉴 때, 문자가 도착했다. [ 오늘 저녁? ]
답장을 했다. [ ㅇㅋ ]
15년 된 남사친이다.
남자사람과 15년이나 친구로 지내는 것은, 세간의 풍문과는 달리 살아보니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단둘이 술만 안 먹으면 된다.
맑은 국물이 보글보글 끓는 샤브샤브 집에서 진우가 가위로 케일을 자르면서 내게 물었다.
- 이유정, 요즘 뭔 일 있냐?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 나 5월달부터 한 달에 한 번 독서 세미나 나갔잖아.
거기 참가자 중 한 명인데, 그 사람이 쓴 독서감상문 듣다 보면 있지.
울컥하다가(연민), ‘우와!’하다가(감동), 왈랑왈랑하다가(설렘), 마지막에 ‘헉!’ 한다니까(지성).
완전 매력종합세트! 하여튼 그 사람 때문에 나까지 독후감 퇴고를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르겠다니깐.
- 남자?
- 응, 남자.
진우는 조금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 남자 얘기 오랜만이네. 듣기 좋다! 근데 어째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잠시 고민했다. 왠지 진우에게라면 아카시아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일어났다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 뭐 고민하냐, 말을 하려다 말어?
- 분명 너가 안 믿을 거니까 그렇지. 나 이상한 애 취급하고.
- 너 4차원 얘기 하루 이틀 듣냐?
- 이것 봐. 그래서 안 한다고.
우린 식당에서 나와 동네 공원을 걸었다.
진우가 편의점에 들렀다 나오며 내 손에 브라보콘을 쥐어주었다.
- 자, 자. 너 제일 좋아하는 거.
하려다 안 한 이야기를 어서 해보라고 채근하는 진우를 못 이기는 척 나는 말을 시작했다.
- 음, 있잖아. 저번에 어린이날. 벌써 4개월 전이네...
조카들 데리고 수족관에 갔거든. 생각지도 못했는데, 거기 어디 딱 가니까...
옛날에 수인이랑 갔던 기억이 떠오르는 거야.
열대어 보면서 수인이가 했던 말이랑, 사진 찍을 때 조명이 어쩌고 그림자가 어쩌고 하면서 까다롭게 굴던 것도 기억나고……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폭풍처럼 기억나면서 너무 슬퍼지는 거야.
조카들은 고모고모 하면서 애교 피우는데, 별안간 아무 소리도 안 들리고 수족관 전체가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었어.
그때부터 시도 때도 없이 수인이 생각이 나. 자꾸만.
진우가 “그랬구나” 하더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곤 침묵을 깨면서 한 마디씩 주고받았다.
- 근데 이유정! 12년이다, 12년.
그동안 남자도 안 사귀고……
다른 건 빛의 속도로 수용하면서, 수인이는……
하여튼 너 이럴 때 보면, 정말 집착 장난 아니야.
- 야, 서진우. 말 좀 잘 듣고 말해.
내가 생각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났다’고.
그리고 수인이 때문에 남자 안 사귀었니?
사귀고 싶은 남자가 없던 거지.
넌 디테일 없는 거 장난 아니야!
우린 잠시 씩씩거리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걷기 시작했다. 잠시 후 진우가 쳇, 거리며 걸음을 멈추고 서 나를 한껏 노려봤다.
- 그래서 ‘독후감’ 보면 울렁울렁하는데, 자꾸 수인이 생각나서 얼굴 그렇게 더 늙었냐?
나도 맞서 노려보다가 절반만 남은 브라보콘을 진우의 손에 돌려 주었다.
그러곤 “누나라고 불러!”라고 쏘아붙이고 휙 돌아서서 구두 소리를 딱딱 내며 집으로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