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정원 Sep 26. 2024

옆구리에 아카시아가 자란다 02

옆구리 이파리에게 이름 지어주기


투명한 연두빛의 이파리는 이내 새끼손가락 한마디 크기로 자라났고, 새로운 싹도 생겨났다.

다음포털에는 ‘꽃 검색’은 있어도 ‘잎 검색’은 없어서 품종이 뭔지 알 수 없었다.

사진이라도 찍어서 네티즌들에게 물어볼까 생각은 했었지만, 왜 그런지 못내 그렇겐 못했다.


잎이 새로 날 때마다 무기력증이 찾아왔다.

잎을 피우는 일에 내 에너지가 소진되는 게 분명했다.


100일 정도 지나자 제일 큰 잎은 새끼손가락만 해졌고, 작은 잎들까지 모두 일곱 장이 되었다.

지금 거울에 비친 내 몸으로 말하자면, 사람의 옆구리에 길죽한 타원 모양의 연두색 이파리 일곱 장이 가지런히 늘어뜨려져 있는 형상이다.


많이 미화되었지만, 얼추 이런 형상 말이다...



이 아인 식물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전혀 식물적이지 않다.

떡잎 때부터 알아보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라서, 초반엔 잘 때도 왼쪽으로 눕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샤워할 때면 더운물이 안 닿게 조심조심, 비누거품도 안 묻게 조심조심, 반신욕도 꾹꾹 참으며 안 했건만,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곧 알게 되었다.

자면서 나도 모르게 왼쪽으로 돌아누워 깔아뭉게도 아무렇지 않았고, 꽉 조이는 보정속옷 속에 구겨 넣고 있다가 꺼내도 자국도 없이 그대로 되돌아왔다.

거품을 칠하고 더운물 샤워를 해도 풀이 죽기는커녕 오히려 더 싱싱해 보였다.


내 옆구리에서 자라나기로 운명지어진 순간, 이 아이도 식물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내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나와 연결되어 있지만 내 몸은 아닌 이 아이……

순간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부를 이름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아카시아’다.     



*



며칠 후 주말, 아침 햇살이 왼쪽 얼굴에 어른거렸다.

희미하게 눈을 뜨니 얼굴 바로 앞에 아카시아가 놓여있었다.

많이 자랐네, 생각하며 눈을 꿈뻑꿈뻑 거렸다.

그렇게 몇 번쯤 바라보다가 고개를 쭉 빼고 다가가 그 위에 얼굴을 올려놓아 보았다.


말랑말랑하고 보드라운 이파리들이 뺨에 눌렸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꺼끌거리고 맹꽁이 같은 아침의 목소리로 “아카시아야” 라고 불러보았다.

웃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웃는 소리였다(*10화 작가노트 참고).

그 후부터 아무 대답도 없는 아카시아에게 난 많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왜 하필이면 내 옆구리에서 나왔어?

넌 원래 품종이 뭐니?

왜 갑자기 나에게 찾아왔니?

아카시아라는 이름은 마음에 들어?

아카시아 꽃향기가 어떤지 아니?


내가 다니던 학교 뒤쪽에 아카시아 향기가 참 좋았어. 어떤 애가 알려줘서 그쪽으로 가는 길을 알게 됐는데, 아카시아가 정말 많았어. 그 길 걷는 걸 참 좋아했는데, 거기 안 가본 지가 12년도 넘었네. …… 그 애는 사진 찍는 걸 좋아해서 어딜 가면 막 300장씩 찍고 그랬어.

…… 내가 다른 사람들한테 너의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건 너가 이상해서 그런 게 아니야. 지금 이상한 건 나니까.

…… 옷 너무 꽉 끼어서 미안. 퇴근하면 곧장 집에 와서 바로 탈출시켜 줄게.     




흠,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


소미에게 말하면? 절대 말 안 한다고 약속하고 바로 남친에게 말할 거다.

지혜는? 남편과 다섯 살 딸에게 말하겠지.

재연이는? 유튜브에 채널 개설하자고 흥분할 거다.

미정이, 부리나케 달려가 엄마랑 고모한테 1+1으로 전할 거다.

엄마, 부리나케 달려와 내 앞에서 대성통곡할 거다.

아빠, 대성통곡하는 엄마에게 화를 낼 거다.

주지스님, 박장대소하실 거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면서 아카시아 잎은 쑥쑥 자랐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